미학적 인간

소조-김영하 논쟁을 보고 든 생각 두 가닥

김남시 2011. 2. 16. 01:07

 

인터넷 매체와 소통

 

성급하게 역사화시켜 버리는 것 같지만, 조영일(소조) 평론가와 소설가 김영하의 논쟁은 여러 가지 점에서 흥미로웠다.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 중심엔 한국 사회에서 예술가/작가의 ‘살아감’이라는 문제가 놓여있다. 예술가/작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가 하고 있는 혹은 하려고 하는 일과 생존하는 일 사이의 갈등을 사회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옳을까? 블로그를 통해 이루어지던 이 논쟁 와중에 최고은 작가의 사망 소식이 알려짐으로써 더 한층 현실성을 얻게 된 이 토론에, 트위터 글로 인해 생겨난 한 바탕의 논란이 있었고, 급기야 김영하는 블로그와 트위터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 논쟁은 내게 우선 인터넷이라는 소통 매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했다. 원리적으로 누구나, 그리고 ‘모두’를 향해 자신의 생각을 ‘공표’할 수 있는 인터넷 소통매체는, 그 즉각적 공공성과 개방성, 실시간성 등의 근거로 커뮤니케이션에 새로운 가능성을 던져줄 것이라고 기대되었지만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자신의 진술을 인터넷에 접근 가능한 ‘모든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공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터넷에 접근 가능한 ‘모든 사람들’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자신에게 집중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함축한다. 그것이 자신에 대한 찬동과 동의일 경우엔 별 문제 없겠지만 비판과 비난일 경우 이를 감당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존재하기 전까지는, 감히 단언컨대,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에게, 바로 자기 자신을 지목해 실시간으로 ‘달려드는’ 그렇게 많은, 원리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비난과 공격을, 그렇게 짧은 시간에, 가시적으로, 눈 앞에서 직접 겪을 기회가 없었다. 1대 1이 아닌 1대 다수의 관계에서, 거의 구술성의 형식을 띤 비난이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이러한 상황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공격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가는 이미 그간 한국에서 일어난 여러 사례를 통해 분명해졌다.

 

이러한 총체적 비판에 자신을 노출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인터넷을 통한 소통에 새로운 감수성을 요구한다. 이를 각오 혹은 극복할 만한 마음가짐이 되어있지 못하면 여기에서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다. 급속하고 집단적인 이러한 비난/비판의 ‘열려진 가능성’에 대해 자신을 방어할 능력과 감수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그로인해 상처받기 쉽상이다. 조영일-김영하 논쟁의 와중에서 조영일은 ‘트위터 사태’를 통해, 김영하는 자신의 블로그에 대한 트랙백과 댓글을 통해 그러한 ‘총체적 비난/비판’을 겪었다. 조영일이 그를 새로운 매체환경에 대한 미숙함이라는 간단한 언급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면, 김영하는 온라인 활동을 접었다. 두 논쟁 상대자는 온라인 매체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 (온라인 소통에 대한 나의 감수성은, 어느쪽이냐 하면, 김영하의 그것에 가깝다.)

 

문학/예술/인문학과 아이

 

이 논쟁과 관련해 내게 다가온 더 큰 물음은 한국사회에서 예술가/작가의 살아감이었다. 예술가/작가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혹은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둘러싼 이 논쟁을 보며 나는 그 범주에 ‘인문학자’를 겹쳐 읽고 있었다. 그 와중 김영하가 올렸던 글에서 다음 대목이 확 눈에 들어왔다. ‘아이’와 관련된 것이었다. (김영하의 블로그가 폐쇄되어 링크 할 수는 없지만 아래 인용 글은 그의 블로그에서 직접 Copy 해 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얘기 하나만 할까 한다. 나보다 어려운 작가들이 부지기수인데 아무래도 엄살 같아서 그동안 잘 하지 않았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등단을 하자마자 나는 결심을 하나 했다.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심을 지켰다. 아이를 양육할 돈으로 더 오래 작가 노릇을 하기 위해서였다. 나처럼은 아니겠지만 내 동료작가들 역시 어떤 식으로든 뭔가를 희생해 지금 여기에 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문학이 나를 받아주는 한, 나는 그저 쓸 것이다. 그리하여 가늘고 길게 살아남을 것이다. 다행히 운이 좋아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문학적 유행은 자주 바뀐다. 내 소설을 읽던 독자들은 언젠가 다른 작가의 책을 읽게 될 것이고 내 소설은 잊을 것이다. 아니, 아예 아무도 소설책이라는 것을 사지 않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의 생존을 늘 고민한다. 살아있어야 쓸 수 있으니까. 소조님은 이런 발언을 작가들의 낭만주의적 허세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작가라는 존재를 잘 모르는 거다. 잘 모르는 대상은 공격할 수도 없고 하물며 바꿀 수는 더욱 없다.

 

김영하는 등단하자마자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 결심의 이유는 “아이를 양육할 돈으로 더 오래 작가 노릇을 하기 위한” 것이다. 김영하는, 그가 실행에 옮긴 이 결심을 “희생해야 했던 뭔가”라고 말한다. 그는 그가 지금 대한민국 문학계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 - ‘지금 여기’ - 에 와있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아이를 갖지 않기로” 했던 이 결심, 그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삶을 위해 사람들이 ‘희생’시키고 있는 그 ‘뭔가 중, 가질 수 있으나 갖지 않는 ‘아이’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복잡한 수치나 통계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이다. 언젠가부터 한국사회에서 “아이”는 자신의 분야에서 어떤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포기 혹은 희생되어야 하는 제일순위가 되어있다. 내게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렇게 삶과 직업의 영역에서 일정한 위치에 오르기 위해 아이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속해있는 분야가 바로 문학/예술/인문학 분야라는 사실이다. 다른 직업분야에서도 성공 혹은 커리어를 위해 아이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겠지만, 다른 직업에 비해 경제적 여건이 훨씬 열악하고, 미래가 불확실한 이 분야에서만큼 아이를 포기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위험 부담과 스트레스를 갖는, 예를들어 증권 매니저 혹은 모빌리티가 요구되는 저널리스트 등등이 자신분야에서 일정한 위치에 도달하기 위해 아이를 포기한다면 이는 개인적 선택의 문제이기 쉽다. 그는 ‘커리어’냐 ‘아이’냐라는 양자택일에서 전자를 택한 것이다. 그런데, 문학/예술 혹은 인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를 위해 아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내 생각에, 단순한 개인적 선택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왜 그런고 하면, 문학/예술/인문학은 다른 인간 활동과는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예술/인문학이 무엇하는 것이냐라고 묻는다면, 아주 나이브한 수준에서 나는, 그것이 인간의 ‘살아감에 대한 성찰’이라 답하겠다. 예술과 문학, 나아가 인문학은 인간의 삶 혹은 살아감의 문제를 다룬다. ‘살아감에 대해 생각함’으로서의 그 활동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살아감이 단순한 생존이 아닌 ‘좋은 살아감’이 될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런데, 문제는 좋은 삶에 대해 생각함은 ‘살아감’ 속에서 이루어 질 수 밖에 없으며 ‘살아감’을 배제하고 괄호친 ‘생각함’이란 원리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이로부터 ‘살아감’과 ‘생각함’ 사이의 갈등과 긴장, 혹은 질곡이 생겨난다. 오늘날 한국의 인문학이 처한 곤란한 상황을 내 방식으로 정의하자면, ‘생각함’을 ‘살아감’의 논리에 종속시켜 버리거나, 그 반대로 ‘생각함’을 ‘살아감’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나온 형행화된 공식으로 만드는 분위기 속에서 ‘생각함’과 ‘살아감’이 서로 충돌하고, 분열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삶의 논리, 다른 한편으로는 삶과 유리된 아카데미즘의 지배 속에서 ‘살아감’과 ‘생각함’ 사이에 심대한 불균형이 강요되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이 깊은 불균형과 갈등의 결절 점에 예술/문학/인문학자들에게서 “아이”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반드시 스스로 아이를 키워보아야만 ’제대로 된 삶‘을 살았다고, 그래서 좋은 살아감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문학과 예술, 인문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아이를 낳고 키워보는 삶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늙은이처럼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인간의 삶의 문제를 다루는 문학/인문학이 처한 오늘날의 조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살아감을 사유하는 사람들조차 아이 갖기를 희생해야만 이 분야에서 일정한 위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김영하가 말하고 또 우리도 널리 믿고있는 이 생각이, 도대체 어떤 조건에서 생겨난 것인지, 그 생각은 문학/예술/인문학의 진정성에 대한 추구와는 어떤 관계을 갖는지 함께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나아가, 예술/문학/인문학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점하기 위해서는, 김영하가 그랬듯. 아이 갖기를 포기해야 한다면, 현재 이 분야에서 그 정도의 위치를 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이를 포기하지 않은 이들은 도대체 어떤 조건 혹은 특혜(?) 속에서 문학/예술/인문학을 해왔다는 것인가를 함께 질문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부인, 남편 혹은 부모의 삶의 시간의 희생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라면 그의 문학/예술/인문학 활동은 그럼에도 어떤 진정성을 얻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건 어떻게 해서야 가능할까?

 

예를들어, 한 해에도 몇 권씩의 책을 출간하는 괴물 인문학자 지젝에게는, 듣기로, 아이들이 있다. 그 정도의 지위에 오르고, 그 만큼의 ’인문학적 활동성‘을 발휘하기 위해, 그는 아이 갖기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에게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이었을까? 그는 자기 아이들에게도 좋은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그 모든 활동을 다 벌일 수 있었을까? 만일 그랬다면 그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가 책을 읽고, 수많은 테레비젼 방송과 영화를 보고 전 세계의 학회를 돌아다닐 때 그의 아이들을 돌보고 챙겨주었던 헌신적인 부인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능력있고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인문학자인 그는 자기 아이들에게는 낯설고 얹짢은, 늘 시간이 없는 아버지일까? 그건 인문학자로서의 그의 정체성과 양립되어도 되는 것일까? 이 두 경우 모두에 있어 아이 갖기를 포기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오늘날 문학/예술/인문학의 활동은, 내가 보기엔, 무척이나 분열적이고 자기 모순적인 살아감의 조건 속에 처해있다. ’좋은 살아감을 생각함‘을 업으로 삼는 문학/인문학은 지금 여기의 삶의 조건 속에서 생겨나고, 우리 스스로가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 분열적이고 자기 모순적인, 문학/인문학자 자신의 삶의 모습을, 이제는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