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인간

모란 미술관에 가다

김남시 2010. 5. 16. 21:26

 

경기도에 있는 모란 미술관에 처음 가 보았다.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선배가 기획한 전시회와 20주년 기념행사에

날 초대했다.

 

그리고 그곳은 정말 좋은 곳이었다.

 

조각들이 놓여있는 야외 전시장은 그렇게 넓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베를린 공원의 벤치에서 느끼던 여유로움을 선사해줄 만큼 충분한 햇살과 공백과 고요함을 주는 곳이었다. 난 한 구석의 벤치에 앉아 햇볕 아래 책을 읽으며, 베를린 시절 스판다우어 담의 조용한 마당 벤치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햇볕을 즐길 때를 떠올리며 행복해했다.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조각들이 내게 또 다른 기쁨을 준다. 저 돌, , 끈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공간들이 주는 부피감은 그림을 볼 때와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림이 거기 그렇게 벽에 걸려 있어 내가 훔쳐볼 수만 있는 여인이라면, 내가 있는 옆에 서 있어 돌아볼 수 있는 조각은 내게 좀 더 친근한 여인 같았다. 그녀는 내가 맘만 먹으면 그녀를 만지는 것 조차 허락해 줄 것이다. 나와 같은 공간에, 내 육체와 같은 부피 혹은 공간을 함께 지니고 있는 조각, 그림의 평면성이 추상적이라면, 그래서 무언가 나와는 다른, 나보다 더 고결하고, 때로는 더 오만하고,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거리감을 만들어낸다면 어쩌면 그림의 그런 거리감은 그림이 존속하기 위해선 필수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그림은 쉽게 망가져 버렸을 것이다 – 그 넉넉한 공간감으로 내가 있는 공간 속에 함께 존재하는 조각은 서로 부등켜 안을 수 있을 만큼 가깝다. 

 

지루한, 내리쬐는 햇볕을 피할 아무 것도 없는 미술관 정원 한 가운데에 앉아있어야 했던 미술관 개관 20주년 식전 행사는 지루했지만, 몇몇 멋진 야외 연주를 들을 수 있는 흔치않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날 함께 오픈한 작가들의 작품전("사이와 긴장" )도 흥미로왔다. 그 중 조재영의 작품은, 프린츠혼 컬렉션에 등장하는 아우구스트 나트라의 그림을 상기시켰다. 자신의 얼굴을 종이에 찍어 그를 얇은 조각 바늘로 찔러 수천 개의 타공으로 만들어낸 그림은, 분열증적이었다. 얇은 철사로 스피커, 에스프레소 주전자, 램프 등의 모습을 만들어낸 작업은, 사물들의 본질을 꽤뚫어 보려고 하는, 분열증적 투사의 의지를 드러내 보여준다.

 

정상현의 비디오 작업도 매우 흥미로왔다. 그가 보여주는 움직이는 이미지는, 카렌다 사진을 배경으로 하고, 그 앞에 역시 사진을 오려서 만든 다른 사진들을 배열해 바람을 불어 움직이는 모습을 비디오 카메라로 찍어 만들어낸 것이다. 움직이는 이미지에서 실제 사물은 아무것도 없다. 마치 창문을 통해서 바깥의 풍경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그 그림은 모두, 사진으로 찍혀진 대상들의 인위적 배열과 움직임을 통해 연출된 것이다. 실재 산과 야외의 풍경과는 달리, 그에 대한 사진들로 연출된 산과 야외의 풍경은, 키취적인 인위성과 실사 사진으로서의 실재성 사이 어디 쯤에 위치한 낯선 느낌을 준다. 작가가 의도한 그 낯선 느낌을 통해 그 움직이는 이미지는 오늘날 점점 더 리얼해지고 있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패러디 한다. 아바타를 통해, 완전히 컴퓨터로 만들어진 그 인공 그림의 사실성에 경탄한 우리들은, 작가 정상현이 손으로 만들어낸 카렌다의 사진을 오려내 벽에 붙이고, , 나무 등의 사진을 오려 레이어를 만들고, 그것들에 바람을 쏘이게 해 움직이게 하고 비디오로 촬영한 -  이미지의 사실성을 낯설게 느낀다. 도대체 우린 얼마만큼 리얼한 이미지를 필요로 하는가. 그리고 그건 얼마나 리얼한가

 

미술관 야외 전시장 한 조각 앞에 피천득 선생의 시 한수가 적혀있다. 내가 알지 못하던 시다. 내가 알았어야 했던

알게 됨으로써 기쁘게 된 시다.  

 

이 순간, 피천득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 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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