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인간

기준으로서의 삶의 시간

김남시 2010. 4. 22. 01:27

한때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교환의 원리가 노동시간으로 통일되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모든 사회적 재화는 그것을 생산하는데 투여된 노동시간에 따라 그 가치가 매겨져야 한다고 말이다. 그건 우리들, 제한된 삶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의 시간이며, 그것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생각이었다. 모두 제한된 삶의 시간만을 가지고 있는 우리 중 누군가가 그 시간 중 일부를 투입해 무엇인가를 생산해내었다면 그 생산물의 가치는, 그것의 물질적 가치에 따라서가 아니라, 거기에 투여된, 그를 위해 소모된 그의 삶의 시간에 따라 매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한편을 제작하는데 1년의 시간이 사용되었다면 그 영화는 바로 그를 위해 소모된 그 만큼의 삶의 시간의 가치를 가져야 하며, 1권의 책을 쓰는데 2년의 삶의 시간이 소모되었다면 그 만큼의 삶의 시간의 결과물인 이 책은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이 생산물들이 서로 교환될 때 일관되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을 것이다. , 30시간의 삶의 시간이 투여되어 만들어진 생산물의 가치가 그 30시간의 삶의 시간으로 측정된다면, 그와 교환될 수 있는 생산물 역시 그에 상응하는 삶의 시간이 투여되어 만들어진 것이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그것의 물질적 가치 - 그것이 천으로 만들어진 드레스건, 금속으로 이루어진 자전거이건, 다이아몬드 반지이건 -, 나아가 생산자의 사회적 위치 그가 앙드레 김 같은 유명 디자이너이건 한 명의 이름없는 재봉수이건 는 생산물의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데 전적으로 부차적이다. 누군가 6시간에 걸쳐 만들어낸 생산품이 10분도 걸리지 않아 찍어낸 상품과 동일한, 심지어 더 낮은 교환가치를 갖는 것만큼 부당한 일이 있을까? 무엇인가를 생산하는데 투여되어 소모된 삶의 시간이 그 사람에게 중요한 것만큼, 그 생산물은 가치를 가지며 또 그에 상응해 교환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생산물의 물질적, 사회적 가치 등을 그를 생산하는데 투여된 삶의 시간이라는 유일한 가치 척도에 복속시킨다면, 나아가 이것이 사회를 모든 교환관계를 지배하는 원리가 된다면 우리는, 모두 제한된 삶의 시간을 갖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동등한 실존적 존재로서 지금보다 평등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물론 여기엔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들이 있다. 통상적으로 볼 때 가격이 비싼 물질은 그를 생산하는데 이미 더 많은 노동이, 따라서 더 많은 삶의 시간이 투입된 것이기도 하다. 다이아몬드가 종이보다 비싼 건 그것이 갖는 특성보다 그를 생산하는데 그만큼 더 많은 노동과 시간이 요구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동일한 삶의 시간이 투입되었다 하더라도 사용된 물질의 가치에 따라 그 생산물이 서로 다른 가치를 갖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닐까? 나아가 누군가가 숙련을 통해 생산할 때 소모되는 삶의 시간을 줄일 수 있게 된 경우엔 어떻게 할 것인가? 숙련된 노동자가 4시간에 걸쳐 만들어낸 책상의 가치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12시간에 걸쳐 만든 책상의 가치보다 더 낮은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인가?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투여된, 또는 같은 말이겠지만 소모된 삶의 시간이 그를통해 생산된 생산물의 가치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쉽게 버리지 못하겠다. 내가 그 만큼의 내 삶의 시간을 통해 만들어낸 무엇인가는 그 삶만큼의 가치를 가져야 하며, 모두에게 그 삶이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중요한 것으로 인정받아야 하며, 그렇게 평등한 서로의 삶의 시간의 중요성을 인정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교환관계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분짓는 능력과 성과를 중심에 놓는 것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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