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인간

지하철에서

김남시 2010. 6. 25. 01:10

화장하는 여자

 

여기는 내가 등장해 내 역할을 수행할 무대가 아니야. 이 곳은 관객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대 뒤의 시끄럽고 지저분한 분장실. 지금 여기 있는 당신들은 무대 객석에 앉아 날 환호하거나 비평할 관객이 아니라, 나와 똑같이, 각자 좋든 싫든 진입해야 할 당신들의 무대를 향해 피로에 지친 몸으로 나아가고 있는 대기자들일 뿐이지. 당신들에게라면 난, 관객들에겐 결코 보여주지 않을 내 얼굴의 주름도, 내가 그를 얼마나 능숙하게 짙은 메이크업 아래 감출 수 있는지도, 검게 칠한 속눈썹이 내 눈을 얼마나 크게 보이게 하는지, 붉은 립스틱이 나를 어떻게 변신시키는지 마음놓고 보여줄 수 있지.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당신들의 무대를 향해 초초하게, 지친 얼굴에 미소를 덮어쓰며 걸어나갈 당신들에게라면, 결코 내 관객이 되지 못할 당신들에게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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