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과 문화

"지금 잠이 옵니까?"

김남시 2009. 10. 17. 15:55

 

 

광고는 협박이다. "안 사면 손해"라는 수줍은 협박에서 부터, 이를 구매하지 않으면 당신, 혹은 당신의 자식은 경쟁에서 낙오자가 될 것이고, 당신의 부부생활은 위기를 맞을 것이며, 당신의 자동차는 거래 업자에게 나쁜 인상을 남길 것이며, 당신의 피로한 육체는 당신 노동력의 판매가치를 위협할 것이라는 위협까지....

 

광고의 이런 협박이 우리에게 '협박'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건 그 광고들이 우리에게 친숙한 얼굴과 반쯤 벌거벗은 아름다운 여인들을 동원해 유혹적으로, 믿음직하게 약속하는 것들을, 정말 우리 스스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느끼게 해 주는 현실과 공모하기 때문이다. 광고가 약속하는 모든 것들을 우리 스스로가 '당연히' 필요한 것이라고 믿게 해주는 현실의 든든한 지원을 받는 광고는, 그래서 우리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며 '이거 마시고, 오늘도 힘내'라고 말하는 박카스 광고처럼 힘겨운 우리들의 유일한 후원자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반적인 경우 광고는 자신이 협박이라는 사실을 숨긴다. 광고는 이 상품을 구매하기로 한 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결단이고, 따라서 그로인한 후회 역시 온전히 당신의 몫이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상품을 구매하지 않았을 때 당신이 감수해야 하는 위험, 위기, 불안과 구매하고 난 후의 후회 사이의 고통스러운 저울질을 요구하면서 광고는, 거대한 현실로부터 강요되는 삶/노동의 조건 속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은 전적으로 '당신의 구매하는 손'에 달려 있다고, 그렇지 않았을때 발생할  모든 실패, 낙오는 전적으로 '당신 자신 선택의 결과'라고 말한다.  

 

강남역 부근에서 본 이 보험광고는 이제 더 이상 협박으로서의 성격을 숨기지도 않는다. 짧은 노동 연한과 보장되지 않은 노후라는 현실 앞에서 그렇지 않아도 불안해 하는 우리들에게 이 광고는, 피곤한 야근과 회식을 마치고 귀가해 다음날 일찍 다시 출근할 때까지 누리는 그  짧은 "잠" 마져도 우리에게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상기시킨다. 그 잠은 이 보험상품을 구매함으로써 현실이 제공하지 않는 '노후 의료비'를 스스로 마련한 사람에게나 베풀어지는 개인적 '성과급'이다. 그를 구매하지 않은 당신은, 마치 숙제나 시험 공부를 해 놓지도 않은 채 쉬려고 하는 게으른 학생들과도 같다. 

 

지..금..잠..이..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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