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과 문화

(2009년 7월 15일) 관찰

김남시 2009. 7. 15. 09:10

아파트 밀림

 

안에 들어서는 사람들의 발길을 막고 시선과 바람을 차단하는 아파트 정글의 탄생은 자연이냐 문화냐라는 이분법으론 규정할 없다. 농지나 산을 구입해 거기에 콘크리트 건물을 세운 건설자본이 땅에 처음 말뚝을 박아 놓았다면, 곳에 입주해 들어온 수백명의 시민들로 인해 주변의 도로와 터널, 마을버스와 지하철 노선, 그리고 밀집된 소비자들을 위한 상점과 가게들은 거의, 그대로의 의미에서 자연적으로, 자발적으로, 즉흥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러한 자연적naturwüchsig 출생은 그들의 이름 – „xx 마을“, „xx 빌리지“, „xx 타운“ – 들에서는 물론 그들의 물리적 인상학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번듯하고 모던한 외관의 아파트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가야 하는 꼬불꼬불한 산길, 농지를 기묘한 커브로 가로지르는 좁은 , 차는 다닐 있지만 사람은 걸어갈 없는 도로, 가건물로 지어졌지만 정식 건물로 자리잡은 상가 건물들이, 이름을 기억하지 않으면 자기가 사는 곳을 찾을 없는 익명화된 주거지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아파트 밀림의 구석 구석까지 우릴 배달해주는 피자집 오토바이 같은 마을 버스가 없었더라면 분명 밀림에서 길을 잃고 맹수에게 잡아 먹혔을 것이다!

 

아파트 사이에 남아있는 좁은 농지와 산을 깍아 만든 공터에 창문 바로 앞을, 햇볕을, 밖을 향한 시선을 가로막는 높은 층의 아파트를 겹겹이 세우려는 건설자본은, 아파트 밀림의 인프라 구조를 강제해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 세워진 3년도 되지않는 건물들도 유감없이 헐리게 한다. 무엇인가를 아끼고 절약해 오래 쓰기 보다는, 빨리 없애고 새로 만들어 판매함으로써만 유지되는 소비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은 세우고 부수고, 위에 세우는 건설 자본의 놀라운 활동력 속에서 가장 분명히 모습을 드러낸다. 주변 아파트 때문에 가격이 오른 땅과 건물주, 아파트 건설 업주 모두를 만족시키는 이런 건설과 파괴, 새로운 건설의 순환은, 곳을 진보와 발전보다는 태어나고 살다가 소멸하는 반복이 지배하는, 헤겔이 말하는 자연 상태에 가깝게 만든다. 인위적 자연상태에서 살아가는 거주자들은, 언제라도 폭등할 있는 전세값과 바로 쪽에 높은 아파트가 세워짐으로써 언제라도 폭락할 있는 아파트 가격을, 주거지를 침범해 오는 강도처럼 두려워한다.

 


 지하철 경로석

 

전적으로 직립 보행만 하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은 그로인해 다른 동물들보다 훨씬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인간이 다른 존재에 의해 보여지게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게 되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한스 부르멘베르크는, 다른 존재에 의해 자신이 보여진다 , 자신의 가시성 Visibilität 의식한다는 것을 인간의 가장 중요한 실존적 특성이라고 이야기한다. (Hans Blumenbergs "Beschreibung des Menschen") 이는 나의 육체가 물리적으로 가시적이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을 보듯 나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질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의식이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삶과 자기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순간에, 혹은 내가 원하는 것과는 다르게 다른 사람에게 보여질 있다는 사실이 우릴 불안하게 한다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고자 하는 욕구는 그에 근거해 형성되는 자아 정체성의 출발점이다.

 

지하철 경로석은 진귀한 방식으로 자신의 가시성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강화시킨다. 아무 주저없이 경로석에 앉을 권리를 주장할 만큼 자신의 가시적인 늙은 육체 대해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 뿐만이 아니다. 자신보다 늙은사람에게 자리를 비워주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곳에 앉아있는 사람들, 나아가 나중에 자리를 비워주어야 하는 멋적음과 욕을 먹을 수도 있는 불쾌함 때문에 아예 곳에 앉기를 포기하는 젊은이들까지, 지하철 경로석은, 지하철을 타고있는 내내,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자신의 가시성을 탐색적으로 의식하게 한다.

 

마음 놓고 경로석에 앉아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내가 사람보다  혹은 나이가 들었을 것이라는 자기의식만이 아니다. 그를 위해선 경로석이 전제하고 있는 나이든 자에 대한 배려라는 사회적 가치질서에 호소할 있을만큼 분명하게 자신의 늙음 허약함 가시화시켜야 한다. 하지만 늙음 사회적 무능력으로, 다른 사회 구성원 모두가 매진하고 있는 가치 창출 활동으로부터의 배제로 의미화되는 사회에서 이는 자신의 사회적  비생산성을 드러내어야 한다는 것을, 나아가 그를 /외적으로 정당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로 우대 카드가 지하철 공사의 재정난과 갈등을 겪고, 경로석이 , 퇴근길의 피곤한 직장인들의 불편함과 충돌한다면 이런 정당화의 요구는 커질 밖에 없다.                   

 

지하철 경로석은 이러한 늙은이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라기 보다는 오히려 가치 창출에 참여하는 자들을 거기에 참여하지 않는 생산적인 자들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구획된 공간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보호구역이 그들에게 독립적 공간을 할당해 줌으로써 오히려 그들을 주류 사회로부터 배제시키는 역할을 하듯.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리지널 원주민들은 스스로 주류 사회에 통합하거나 격리와 배제를 위한 특화성을 주류 사회의 관광자원으로 하위화시킴으로써 점점 소멸되어 가겠지만, 자본의 가치창출에 참여하지 않는/못하는 늙은이들의 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증가한다. 그들에게 배분된 소수의 경로석은 이미 이들을 구획, 격리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하며 그래서 그들은 그들에게 할당된 공간을 넘어서까지 침입 온다.




 

배제와 격리로서의 경로석은 이를통해 애초의 기능을 상실하고, 그것의 외면적 명분이었던 노인에 대한 사회적 배려라는 가치는 노동하는 젊은이들의 피곤함을 위협하는 외적 강제로, 타당성을 노인들의 사회적 유효성과 저울질 해보아야 하는 낡은 이념으로 다가온다.        

  

경로석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 예약석입니다라는 지하철 계도문구는, 그래도 아직은 지하철로 출퇴근 있는 당신도 조만간 남루한 사회적 비생산자의 대열에 속하게 것이라는, 그렇지 않아도 일상적으로 느끼고 있는 탈락과 낙오의 위협을 상기시키면서, 그렇게 탈락하고 배제된 자들이 자신의 낡음/늙음을 입장권 삼아 진입하려는 구획과 배제의 공간을 유지시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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