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과 문화

벌금과 속죄금

김남시 2007. 10. 14. 00:59

 

주차 금지 구역에 차를 세워 놓았거나,  도로에서 교통 위반을 했을때, 아니면 노상 방뇨나 무단횡단 등을 하다 적발되었을 우린 - 물어야 한다. „벌금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말해주고 있듯 그건 지정된 법규나 규약을 위반한 우리의 대한 이다. 힘들게 모은 돈을 아무 댓가도 없이 그저 내가 어떤 행동 때문에 지불해야 한다는 무척이나 속쓰리고 불쾌한 일이다. 그리고 불쾌함은 내가 행한 죄에 대한 처벌로써 내가 감수해야 하는 댓가다.   

 

독일에서 벌금은 “Bußgeld“ 라고 불린다. 다시말해 „Buße“ 위해 지불하는 „Geld“이라는 의미이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 사용된 단어 „Buße“ 독일 문화권 내에서 복합적인 종교적 함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좋은 gut“ 비교급 나은 besser“이란 뜻의 게르만 고어 „bass“ 어원으로 갖는 단어는 원래 무엇인가 나은, 좋은 상태 지칭하는 것이었으며, 이렇게 나은, 좋은 상태로 도달된다는 의미에서 마법을 통해 정화됨이라는 맥락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지하철과 거리에서 활동하는 한국의 열렬 기독교인들에 의해 유명해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태복음 4 17)라는 성경 구절에도 등장(„Tut Buße; das Himmelsreich ist nahe herbeigekommen!“[1]) 하는 단어는 같은 맥락에서, 앞에서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의례인 고해성사 Buß-sakrament„ 지칭할 때도 사용되게 되었다.[2]  이러한 컨텍스트 내에서 „Buße“라는 단어는 우리를 더럽히거나 물들이고 있는 죄로부터 자신을 씻어 내어 지금보다 나은 정화된 상태 도달하기 위한 행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Bußgeld“ 라는 독일어 단어는 자신의 죄를 씻고 정화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이라는 내용을 함축하는 속죄금 혹은 회개금으로 번역될 있을 것이다. 단어는 자신이 행한 죄의 댓가로 부과되는 로써의 벌금과는 상당히 다른 함축을 지니고 있다. ‚벌금이라는 단어가 자신이 행한 죄에 대한 대가로 외부로부터 처벌 부과받는 수동적이고 대상적인 주체를 전제하고 있다면, ‚속죄금이라는 단어 속에는 자신의 죄를 씻고 정화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 고통스러운 행동을 자진해서 받아들이는 능동적 주체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고통스러운 속죄 행위를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이러한 주체는 1517, 면죄부에 반대해 마틴 루터가 걸었던 95 테제[3] 중심 생각이기도 했다. 루터에 의하면 참된 속죄Buße 고해 성사와 같은 예식을 통해서나, 혹은 면죄부를 구입함으로써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려는 마음가짐으로 진실되게 뉘우치며 Reue 신에게 회귀하는 평생 동안의 신앙적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테제 1,2) 교황은 다만 교회법에 의거 교황 자신이 부과한 벌들만을 면죄해줄 있을 , 모든 인간을 죄에서 사면하고 구제시켜 수는 없으며(테제5, 20), 나아가 누군가의 죄를 사해줄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교황이 아니라 전적으로 신의 결정에 달려있는 문제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쫓는 속죄로서의 삶을 통해 거듭나야만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죄로부터 벗어날 것을 기대할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진정한 신앙인은 면죄부를 구입해 죄로부터 벗어나려 하기보다는 참된 뉘우침을 위해 오히려 고통스러운 벌을 자진해서 달갑게 받아들이는 길을 택한다. (테제 36, 40) 육신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내재된 이기적 경향들과 싸워는 (테제 3) 평생 동안의 금욕적 실천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속죄를, 면죄부를 구입함으로써 얻을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게으르고 태만한 신앙인들이나 하는 [4]이다.

 

우리는 속죄Buße 가능성을 성직자나 교회에 맡겨두는 대신 신앙인 스스로 현세 내에서 수행하는 금욕적 삶의 실천으로 끌어들인 이러한 프로테스탄티즘의 내면화된 신앙이 얼마나 깊이 유럽 문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를 알고있다. 막스 베버가 분석했듯 그것은 자신이 벌어들인 이윤을 소비하고 향유하는 대신 금욕적으로 재투자하는 초기 자본주의적 정신의 토대가 되었고[5], 경건하고 검소한 세계 내적 금욕을 통해 속죄하는 그리스도적 삶을 개인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던 경건주의 Pietismus 흐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모든 삶의 방식들의 중심에는 자신의 죄를 의식하고 이를 이웃에 대한 사랑과 금욕적 삶의 태도를 실천하며 속죄하길 원하는 주체가 자리잡고 있다. 

 

세적 자체를 자신을 정화하는 속죄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이러한 삶의 태도는 거리에서 누군가에게 말을 때나 버스나 교실에서 잠시 서로 몸이 부딪혔을 뿐인데도 나의 Schuld 사면해 주십시오“(Ent-Schuldigung!)라며 사과하는 독일인들의 언어 관습 속에서도, 지하철 , 은행과 우체국 창구, 병원과 대학 건물 어디를 가나 찾아볼 있는 이웃사랑 실천하라는 수많은 기부금 광고와 용지들에서도 흔적을 찾아 있다. 이렇게 본다면 현대 사회의 시민들에게 (세속화된) 사회적 규칙을 준수하도록 강제하기 위한 제도를 속죄금Bußgeld’이라고 부르게 데에는 어쩌면 오래된 프로테스탄티즘적 삶의 태도가 작용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오늘날 독일인들이 교통 신호를 위반하거나, 자기 강아지가 길거리에 놓은 똥을 치우지 않아 Bußgeld 지불해야 했을 , 그를 정화와 속죄를 이룰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이며 기뻐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 인상되고 있는 물가에 허덕이는 독일인들은 범칙금 액수를 인상하겠다는 얼마전 시의 발표에 발끈하며 열받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독일인들이 세속화된 제도를 여전히 속죄금이라고 부르고 있는 현상은 지젝이 지적[6]했던 오늘날의 유예된 믿음 형태의 다른 대응물로 이해할 있을 것이다. 종교적 가르침을 진지하게 믿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나가고, 부활절과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듯, 오늘날 독일인들은 속죄라는 단어가 지니는 뿌리깊은 종교적 의미를 진지하게 수용하지 않으면서도, 매일 매일 속죄금 지불하고 있다. 전자가 믿음이 문화적 삶의 형태로 자리잡은 경우라고 한다면 후자는 그것이 세속화된 시민 사회적 제도에 남겨놓은 흔적이다.  오늘날 종교의 완전한 지양 꿈꾸는 사람은 성공적인 언어 개혁가가 되어야 한다.       



[1] Martin Luther : Das Neue Testament, Matthäus 4.17.

[2] 이상 Duden, Das Herkunftswörterbuch, Buße.

[3] Martin Luther : Die 95 Thesen, 1517, in Martin Luther : Die reformatischen Grundschriften Bd. 1. Gottes Werke und Menschenwerke, S.15ff.

[4] M.Luther : Sermon von Ablass und Gnade 1518, M. Luther ; Die reformatorischen Grundschriften, Bd1. S.28.

[5] Max Weber : Protestantismus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6] Slavoj Zizek : Die Puppe und der Zwerg. Das Christentum zwischen Perversion und Subversion, Shurkamp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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