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과 문화

지하철 개찰구와 법의 힘

김남시 2007. 7. 12. 19:06

 

파리의 지하철을 사람들이면 누구나 지하철 플랫폼으로 들어가기 전에 구입한 승차권을 집어넣고 통과해야하는 사람 키만한 높은 개찰문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허리 높이 정도의 한국 지하철 개찰구 차단막이 래도 유사시(?) 간혹 위를 훌쩍 뛰어넘을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반면, 파리 지하철 입구의 차단문은 , 아래, 어느 쪽으로도 넘어갈 여지가 없이 좁은 지하터널 입구를 완전히 봉쇄하고 있다. 구입한 승차권 (캬르떼) 개찰구에 통과시켜야만 열리는 문은 유모차 1대도 지나갈 없을 정도로 좁고, 그것도 빨리 지나가지 않으면 부딪히면 아플 정도의 속도로 다시 닫혀버린다. 이처럼 도저히 무임승차가 가능할 같지 않은 구조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찰구를 지나 지하철을 향해 미로같이 이어져 있는 기나긴 지하 터널을 걸어가다 보면 가끔 총을 매고 세퍼트를 동반한 검표원들이 경찰과 함께 승차권 검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접하기도 한다.   

 

이러한 파리 지하철의 개찰 시스템은 승차권 없이 지하철을 타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어떤 오해의 여지없이 말해주고 있다. 무임승차 금지는 그를 위반하는 것을 아예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개찰구 차단문을 통해 가시화되어 있으며, 이렇게 가시화된 물리적 금지를 통해 법은 자신의 질서를 유지하는 힘을 작동시키고 있다.   

 

베를린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지하철 탑승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베를린의 지하철 입구엔 한국이나 파리에서처럼 표를 집어넣고 그를 통과해 지나쳐야 하는 개찰구 장애물, 탑승전에 차표검사를 하는 검표원도 없다. 지하철과 지하철 밖의 거리 사이엔 아무런 눈에 띄이는 구분도, 칸막이나 울타리도 없이 열려 있어서 승차권을 가지고 있건 아니건 상관없이 누구나 아무런 장애없이 지하철 플랫폼에로 들어갈 있는 것은 물론, 지하철 까지 탑승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베를린 지하철이 시민 모두가 공짜로 지하철을 있도록 무임 승차제를 실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여기서도 지하철을 타기 위해선 결코 싸지않은 승차권을 구입해야 하며 그를 어길시에는 벌금을 지불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이나 파리의 지하철과는 달리 독일의 지하철 개찰 시스템은 무임승차를 금지하고 있는 규칙과 법을 가시적 형태로 드러내고 있지않다. 파리의 지하철이 그를 물리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개찰구 차단문을 통해 무임승차 금지를 분명하고도 오해의 여지없이 말하고 있다면, 베를린의 지하철에서 무임승차는 금지되어 있지만 금지는 눈에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다. 지하철을 타는 베를린의 시민들이 사실상 모두 내부에서 움직이고 있는 규칙과 법은 가시적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파리 지하철에서의 법과 규칙이 오해의 여지없는 가시적이고 외적인 금지 개찰구 차단문, 총과 개를 가진 검표원들 통해 작동한다면, 베를린에서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금지를 사람들에게 내면화시키게 함으로써 작동한다.

 

내면화는 무엇보다 금지를 규정하고 있는 법의 비결정성과 모호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카프카의 단편 < 앞에서>에서 법의 성문을 들어가고자 시골 사람은 안이 들여다 보이게 활짝 열려 있는 앞에서 다만 지금은 통과시켜 없다 문지기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문지기는 결코 문을 통과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모호성과 비결정성은 시골 사람으로 하여금 언젠가는 문지기가 자신을 통과시켜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죽을 때까지 앞에 앉아 기다리게 한다. 만일 문지기가 처음부터 문을 통과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분명하고도 오해의 여지없이 말했더라면 시골 사람은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법의 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처럼 독일 지하철의 부재하는 개찰구는 승차권 없이 지하철을 타는 것을 환영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파리의 지하철 차단문처럼 그를 적극적으로 금지하고 가로막지도 않는다. 열려있는 법의 성문처럼 어떤 칸막이나 구분도 없이 활짝 열려져 있는 지하철 개찰구는 이러한 모호성과 비결정성으로 인해 많은 사람에게 금지되어 있는 무임승차에 대한 기대를 품게하는 유혹으로 작용한다.

 

금지가 금지행위를 물리적이고 가로막는 차단문, 장애물, 칸막이, 금지선, 통제구역 등을 통해 가시화되어 있는 곳에서 금지를 위반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다만 그를통해 생겨난 허용된 공간 안에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승차표가 없으면 아예 열리지 않는 지하철 개찰구 앞에서 우리는 별다른 고민없이 승차표를 구입하거나 아니면 걸어가는 길을 택한다. 그러나, 금지가 눈에 보이지 않게 작용하고 있는 곳에서 사람들은 모호하고도 비결정적인 금지를 자신 행위의 최종 근거로 수용할 것인지, 아니면 그를 위반함으로써 생겨나는 이익을 취할 것인지를 스스로 판단해야할 유혹에 빠진다. 왜냐하면 금지가 눈에 보이지 않게 작용하고 있는 곳에선 그것의 위반 역시 쉽게 눈에 띄이지 않기 때문이다. (파리 지하철에서 무임승차를 하기 위해선 막강한 차단문을 폭력적으로 열고 들어가야 하지만 베를린에서 무임승차는 그냥 다른 모든 승객들 틈에 끼어 자연스럽게 지하철에 올라타기만 하면 이루어진다.)

 

비가시적인 금지의 모호성과 비결정성으로부터 생겨나는 이러한 위반의 유혹을 알고 있는 베를린 지하철 측은 무임승차를 적발하기 위해 또다시 비가시적인 검표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것이 비가시적인 이유는 임의의 시간에 불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승차표 검사가 사복[1] 입고 일반 승객들과 같이 지하철에 탑승한 검표원들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표를 사지않고 무임 승차자들은 언제라도 자신이 지하철에 사복을 입은, 따라서 일반 지하철 승객들과 구별되지 않는 검표원들이 승차해 표를 보여주기를 요구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며,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검표원들[2]에게 적발되었을 경우 그는 지하철 승객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게 되는 것은 물론 적지않은 액수의 벌금을 지불해야 한다.   

 

이러한 비가시적 검표 시스템은, 개찰구 차단문이나 승차전 검표 제도 없이도 베를린 지하철이 적자를 입지 않을 있게 해준다. 그건 그를통해 보이지 않는 금지를 지하철을 타는 개인들에게로 내면화시키기 때문이다. 승차표를 통과해야만 열리는 차단문이 승차권 없이 지하철을 가능성을 아예 처음부터 배제해주는 파리의 지하철과는 달리, 개찰구도 검표도 없는 베를린에선 언제든지 깜빡잊고 집에 두고 승차권을 의식하지 않은 지하철을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시에 이루어지는 검사로 인해 창피를 당하고 벌금을 물지 않기 위해 지하철을 타기 전에 자기가 유효한 승차표를 가지고 있는지, 혹은 정기권 기간이 만료되지는 않았는지를 스스로 점검하고 챙긴다.

 

베를린 지하철의 이런 시스템은 외적인 금지, 차단, 통제 등을 되도록이면 사회의 가시적 영역에서 배제하려는, 나찌와 68 겪은 독일 사회의 의식적 노력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가시적인 금지와 차단, 통제 등을 통해 드러나게 국가와 법의 눈에 보이는 폭력을 사회의 공공영역에서 최소화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비가시적 금지와 법을 내면화하는(해야하는) 독일인들의 내적 규율화에 대응한다.  



[1] 사복은 부정적으로만, 제복이 아닌 옷으로 규정될 수 있다. 왜냐하면 도대체 사복이란 어떤 특정한 형태와 모양을 지닌 옷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제복처럼 일률적이고 획일적 형태로 규정되어 있지 않는 일반인들이 입는 다양한 옷 일반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복경찰, 사복검표원 등이 그를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숨길 수 있는 이유도 사복이 갖는 이러한 모순적 일반성에 의해서이다.

[2] 우리 검표원들도 무임승차한 당신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베를린 지하철공사 BVG 벌였던 무임승차 금지 캠페인의 모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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