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 있는 세계

[스크랩] 근대 비극에서의 고대 비극의 반영

김남시 2009. 4. 3. 00:03


김남시님과의 대화를 진척시키기 위해 나는 키에르케고르(K)의 “근대 비극에서의 고대 비극의 반영” (“Le reflet du tragique ancien sur le tragique moderne” in Ou bien... ou bien, p. 109-128)이라는 작은 논문을 읽었다. 이전에 쓰여 진 나의 글은 김남시님의 글에 쓰여 진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설명에 의존해서 전개된 논의였다. 나는 이 글을 직접 읽으면서 키에르케고르의 이 글이 다른 방향에서 다시 읽혀질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우리의 논의가 다른 방향으로 말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헤겔과 키에르케고르는 동시대에 살면서 서로 다른 철학적인 길을 간 두 사람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주관적인 혹은 내적인 것은 언제나 헤겔에게는 그의 객관성에 비교해서 웃음거리의 하나였다. 이 글은, 이런 역사적인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키에르케고르가 헤겔과 다른 입장에서 그가 살고 있던 시대, '근대'라고 상황에서, 다시 말해, 근대적인 의미에서 진정으로 비극적인 것이 무엇인지 밝히려는 한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K는 이 글의 서두에서 이 글의 목적을 명시한다.


이 작은 연구의 목적은 고대 비극과 근대 비극과의 관계를 다루기보다는 어떻게 고대의 비극이 진정으로 비극적인 것 le vrai tragique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근대 비극에 결합되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p. 110)


여기서 K가 가정하는, 밝히고자 하는 '진정으로 비극적인 것'은 고대 비극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고대 비극의 어떤 요소가 시간적인, 역사적인 과거를 뛰어 넘어서, 현재에, 근대 안에서 결합되는,  울려오는, 반복되는 비-시간적인 어떤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이 결합방식은 이 글의 뒷 부분에서, 헤겔이 그 자신의 철학의 체계 안에서 안티곤을 읽었듯이, K가 안티곤을 자신과 동일화 하면서 근대 안에서 그녀를 살아내는, 읽어내는 방식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헤겔이 읽는 안티곤이 아닌 K가 읽는 근대의 안티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K는 이 결합을 말하기 전에 우선 그가 살고 있는 시대, 즉 근대(현대)와 고대를 비교한다.


그리스 시대와 비교해서, 우리의 시대는 어떤 특별함이 있다. 그것은 고대보다 더 우울하고 그로 인해 더 깊은 절망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시대는 책임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 중요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우울하다. 그리고 모두가 지배하고자 하는 한에서, 누구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p. 111)


진정으로 비극적인 것을 밝히는 과정에서 이 책임과 비극의 관계는 K에서, 마치 파스칼에서 무죄이면서 죄의식을 가지는 역설이 존재하는 것처럼, 이 비극적인 책임은 K의 안티곤, 다시 말해, 그가 다시 읽는 근대의 안티곤을 통해서, 죄와  무죄의 진동 사이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이 진동은 고대의 비애의 애매성과는 다르게 의식의 반성 안에서 자기가 저지른 죄가 아닌 죄를 자신을 것으로 받아들이고 책임지는 모습 안에서 드러난다. 여기에 고대의 비애(Trauer)에서 괴로움(Schmerz)으로의 진정한 이행이 존재하게 된다.


K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으로 비극적인 것과 책임의 관계를 밝히기 전에 우선 근대 비극과 고대 비극의 드러난 차이점을 K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고대 세계에서 주체성은 반성된 것이 아니다. 비록 개인이 자유롭게 행위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국가, 가족, 그리고 운명과 같은 실체적인 규정들(les d?termination substantielles)에 의존한다. 이 실체적인 규정은 고대 비극에서 치명적인 것이고 이것은 고대 비극의 특질을 이룬다. 따라서 고대에서 영웅의 몰락은 그 자신의 행위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고통을 동반한다. 반면에 근대의 비극의 영웅의 그것은 진정으로 고통이라고 할 것은 없으며, 단지 행위만이 있다.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것은 결국 상황성격이다. 근대 비극의 영웅은 주체적으로 반성하며, 이 반성은 국가, 가족, 운명과의 접촉 밖에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이전의 삶과의 접촉 밖에 있다.(p. 112)


즉, "근대의 비극은 어떤 서사적인 기획도, 어떤 서사적인 유산"도 그 자신의 구성 요소로 가지지 않으며, 영웅은 단지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만 유지되며, 그 행위로 인하여 몰락할 것이다. 반면에 고대 비극에서 영웅의 잘못(hamartia, 혹은 실수 erreur)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의하면,(K. p. 112) 행위와 고통 사이의 매개적인 것으로 여기에 비극적인 충격이 자리한다. 그런데 만일  주체성이 반성적이 되면 될수록, 우리의 모든 행위는 개인으로 다 환원될 것이고, 잘못은 다 윤리적이 될 것이다. 그런데 비극적인 것은 이 둘의 극단의 중간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K는 말한다. 만일 어떤 잘못도 개인에게 부가되지 않는다면,  비극적인 관심은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비극적인 충격이 약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영웅의 잘못이 절대적이 되면, 여기서도 어떤 비극적인 관심을 끌어낼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K가 고대 비극에 대한 잘못된 해석(p. 112)이라고 부르는 이 해석이 헤겔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헤겔은 정신 현상학 VI장 <정신>에서 의식의  발전 단계에서 윤리적인 단계를 다루면서 그리스 비극의 예를 들어 인간의 법(크레온, 낮을 대표하는 남자)과 신의 법(안티곤, 밤을 대표하는 여자)이라는 두 윤리적인 세계의 실체적인 대립으로부터 후자가 전자에 통합되는 방식으로 그려진다. 또한 『미학강의』에서도 마찬가지지로 안티곤과 크레온의 대립을 윤리적인  대결로, 이 둘의 대립은 폴리스 Polis (남성으로 대표되는정치적인 영역)와 가족 (여성으로 상징되는 가정)의 윤리적인 대립 conflit으로, 이 대립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다시 말해 잘못은, 헤겔에 의하면, 정신 현상학에서 헤겔이 '성격'이라고 부르는 것과 상응하는, 각각의 인격의 "일방적인  정서"l'unilat?ralit? du pathos에서 연유한다. 결국 각각의 행위는 각자의 '성격'과 그가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래한다. 하나는 "감정과 사랑과 피의 신인 저승의 신 Had?s에 의존해서", 국가의 법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다른 하나는 "국민과 국가의 의식적인 삶을 드러내는 신 Zeus에 의존해서" 국가의 근간인 가족의 사랑을 무시하면서,  "이들 각자는 각각의 삶의 영역에서 서로를 파괴"하고 있다고 헤겔은 말한다. 이런 일방성은 지양, 극복되어야 하며, 시민의 윤리는 가족의 윤리를 자기 안으로 포섭해야한다고 le droit naturel de la cit? s'incoporer le droit familial헤겔은 말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영웅의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고자하지 않으며, 우리는 그의 어깨 위에 그의 행위의 결과로서 그의 모든 삶을 던져버리고, 우리는 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킨다. 그런데 바로 이로 인해서 우리는 미학적인 잘못을 윤리적인 잘못으로 변화시킨다. 이로 인해 영웅은 악인이 되며, 악은 진정으로 비극적인 것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 악은 어떤 미학적인 관심도 끌어내지 못한다. 또한 여기서 죄(p?ch?)도 미학적인 요소라고 할 수 없다. (p. 112-113)


여기서 우리는 K의 인간 실존의 전개의 3단계 stade를 상기해야할 것이다. 그 첫번째 단계는 미학적인 단계이며, 다음은 윤리적인 단계이고 마지막은 종교적인 단계이다. 이 글에서 K는 안티곤을 헤겔처럼 윤리적인 단계로 읽는 것도, 파토스가 지배하는 미학적인 단계로서의 고대비극의 입장에서 읽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단계인 종교적이며 비극적인 영웅으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단서는 K가 책임과 비극적인 것을 결합하려는 시도, 다시 말해 서두에서 그가 밝히듯이 고대의 비극적인 것이 근대에 결합되는 방식에 주목할 때 드러난다. 책임이라는 개념은 일반적인 이해에서 근대적인 자유의 의식 없이는 발생할 수 없는 것이며, 비극적인 것은 책임과 관련된 자유의 의식이 아니라, 실체적인 외적 규정, 혹은 운명의 지배적인 규정에 의해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종교적인 이 마지막 단계에는 외적인 운명을 자신의 내적인 필연적인 운명으로 의식의 반성 안으로 끌어안는 비극적 죄의식이 존재하게 된다.    


우리 시대는 가족, 국가, 세대라는 실체적인 규정들을 다 읽어 버렸다. 우리 시대는 각각의 개인이 자신의 운명이 되도록 강요받는다. 이 각자의 운명이 된다는 것은 결국 각자가 자신의 창조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잘못은 죄가 되며, 그의 고통은 후회가 되며,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하여 비극적인 것은 사라진다. 또한 그 말의 가장 고유한 의미에서의 고통의 비극이라는 것도 실제로 비극적 관심에서 사라진다. 왜냐하면 고통을 낳는 그 힘이 그 중요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관객은 이제 다음과 같이 소리친다: 너 스스로를 도와!  그러면 하늘이 너를 도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관객은 더 이상 ‘함께하는 고통’ (동정, commis?ration)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이 ‘함께하는 고통’은 객관적인 의미에서 만큼 주관적인 의미에서 비극적인 것의 진정한 표현이다.(p. 116)


미학적인 단계가 순수하게 주관적이며, 윤리적인 단계는 순수하게 객관적인 것이라면,  K가 말하는 종교적인 단계는 주관적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인 어떤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말하는 변증법이 헤겔의 그것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안티곤 읽기에서 드러날 것이다. K는 이 '함께하는 고통'으로부터 진정으로 미학적인 고통la vraie peine esth?tique이 무엇인지 밝히고자 한다. 


K는 그리스 비극에서 - 예를 들면 소포클레스의 Philoct?te - 비애(Trauer, peine, 남시님이 '비극적 슬픔'이라고 옮긴 것을 '비애'라고 옮긴다)에서 괴로움(Schmerz, douleur, 남시님이 '고통스러움'이라고 옮긴 것을 '괴로움'이라 옮긴다)으로의 전이 transition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p. 117) 그 계기는 필로테트가 "왜 이 고통이 다른 이가 아니고 나에게 일어났는가?"라고 묻는 순간에 생겨난다. 이 계기는 비극의 바뀌지 않는 운명에 대해 던지는 주체의 '반성'의 계기라고 K는 말한다. 그런데 이 반성은 항상 혼자이고자 하며, 이 분리 안에서 새로운 고통을 찾는 진정으로 반성된 괴로움과는 대립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김남시님의 논의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비애는 고대적인 고통의 양태이며, 괴로움은 근대적인 고통의 양태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K는 새로운 안티곤 읽기에서 이 두 종류의 고통이 어떤 방식으로 결합되는 가를 보여준다.  


진정한 비극의 비애는 잘못이라는 요소를, 진정한 비극의 괴로움은 무죄의 요소를 요구한다, 진정으로 비극적인 비애는 투명성의 요소를 진정으로 비극적인 괴로움은 어둠의 요소를 요구한다. 이로부터 나는 비애와 괴로움의 정의가 만나는, 비극적인 잘못이라는 이념 안에서 발견되는 변증법을 보다 잘 그려낼 수 있다고 믿는다.(p. 118)


이를 위해, K는 희랍 비극의 여 주인공을 불러낸다. "그녀는 항상 내 앞에 있으며, 내가 그녀를 내 앞으로 불러낼 때, 그녀는 끊임없이 다시 태어난다. 그녀의 이름은 안티곤이다."(p. 119-120)


비애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비극적 잘못은 죄의식(culpabilit?, Schuld)과 무죄(innocence, Unschuld) 사이에서 진동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잘못이 안티곤의 의식 안으로 들어 온다면, 그것은 언제나 실체성의 기능에 의해서 이루워져야 한다. 왜냐하면 비극적인  잘못은 비애가 도입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결정되지 않은 성격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며, 반성은 (헤겔에서처럼) 그것의 무한성 안에서 실행되어서는 안된다. 그럴 경우, 안티곤은 자기의 잘못 밖에서 반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무한한 주체성(정신의 주체성) 안에서의 반성은 비애를 낳는 이 원죄라는 요소가 존속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그것은 헤겔에 의하면 언제나 지양의 대상이다) 그런데 일단 깨어난 반성은 안티곤을 그의 잘못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녀 안에 머물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그리고 반성은 매 순간 그녀 안에서 비애를 괴로움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p. 120)    


정신의 운동으로서의 반성이 아닌, 한 개체의 내면성 안에서 반성되는 비애에서 괴로움으로 이행은 K의 입을 통해 '불안 angoisse' 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이제 K가 다시 쓰고 연출하는 안티곤을 읽어보자. 오이디프스가 스핑크스를 죽였으며, 테베를 해방시켰으며, 오이디프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으며, 그의 어머니와 결혼했으며, 그 열매가 안티곤이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리스 비극의 시나리오이다. 이 비극의 시나리오를  키에르케고르는 근대의 배경에서 변경한다. 


"모든 사람들이 오이티프스가 스핑크스를 죽였으며, 테베를 그로부터 해방시켰다는 것을 안다. 그는 국민들에게 존경과 숭앙의 대상이었다. 그는 부인 조카스트와 딸 안티곤과 행복한 삶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나머지는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다. 안티곤만이 그것을 안다. ... 이 모든 비밀이 전개되기 전에, 여리디 여린  젊은 그녀 안에서, 이 끔찍한 비밀에 대한 어두운 의심은 순간적으로 그녀의 영혼을 사로 잡았으며, 일격에, 확실성이 그녀의 불안이라는 품에 던져지기까지 그녀의 영혼을 사로 잡았다. 여기서 나는 근대 비극의 정의와 만난다. 왜냐하면 불안은 반성이기 때문이며, 본질적으로 비애와 다르기 때문이다. 불안은 존재자가 비애를 내재화하고 자기화하는 데 그 의미를 가지며, 비애는 그 힘으로 인해, 심장으로까지 뚫고 들어가는 그런 것이다. ... 마치 성적인 도착에 빠진 시선이 그 대상을 삼켜버리려고 하는 것처럼, 불안은  비애를 삼켜버릴 듯이 바라본다. 마치 조용하고 움직이지 않는 사랑의 시선이 사랑의 대상에 매달여 있는 것처럼, 불안은 비애 앞에서 자신을 소모한다. 그런데 이 불안에는  그녀로 하여금 더 강하게 그 대상에 집착하도록 하는 어떤 이상의 요소가 있다. 그녀는 그것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두려워한다.  불안에는 이렇게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한편으로, 불안은 비애를 발견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이 비애를 창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순간은 갑자기 이어지는 다른 순간 안에서 지워진다. 바로 여기에 진정으로 비극의 정의가 있다. "quem deus vult perdrer, primum dementat; ceux que le dieu veut perdre, il commence par leur ?ter la raison; 신이 누군가를 파괴하고자 할 때, 그는 그들에서 이성을 떼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라는 이 오래된 격언은  바로 이 상황에 적합한 말일 것이다."(p. 120-121)


매순간 창출되는 비애의 순간은 연속과 극복과 완성의 변증법으로서의 헤겔의 것과 구분되는 것으로, 표상의 질서로 환원되지 않는  K의 순간과 반복의 운동, 변증법을 보여준다. 이러한 반복으로서의 비극의 주제는 들뢰즈가 『반복과 차이』에서 K를 끌어들이면서 <반복의 극장>이라고 부르는 상황과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만일 안티곤이 그의 오빠의 시신을 장사지려 하는 것이, 마치 동생의 오빠에 대한 사랑과 인간적 의지에 의한 금지 사이의 충격이라는 '고립된 한 사태'라고 (헤겔처럼) 읽는다면, 이것은 고대 비극이기를 그치고 근대비극이 될 것이라고 K는 말한다.


"희랍적 의미에서 비극적 관심을 창출하는 것은 실제로 오빠의 불행한 죽음 안에서 전적으로 인간적인 금지 안에서, 마치 불행한 반송 - 오이디프스의 비극적 운명 - 이 후손들과 가족들에게 다 전달되는 것처럼, 오이디프스의 슬픈 운명이 공명하는 것이다....이렇게 풀려난 객관적인 비애가 마치 자연의 힘처럼 앞으로 전진한다. 슬픈 안티곤의 운명은 마치 그의 아버지의 슬픔의 에코(울림)처럼 잠재적인 비애가 된다. 결국 안티곤이 그의 오빠를 장사지내려고 할때 우리는 여기서 그녀의 자유로운 행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걱정의 무게로 다가오는 치명적인 필연성을 본다. 어쨌든 여기서 그녀의 자유는 그녀의 형제애에서 우리가 그녀를 충분히 사랑할 수 있을 정도로 크다. 반면 운명의 필연성 안에서 우리는 오이티프스와 그의 가족의 삶의 최상의 제동을 발견한다.  ...그녀의 삶은 그리스의 안티곤의 삶처럼 전개되지 않는다. 그녀는 밖으로 전개되지 않고 반대로 안으로, 연극의 장은 밖에서 일어나지 않으며, 안에서 일어나며, 그것은 정신적 장 sc?ne이다."(p. 121-122)  


결국 그녀는 그녀가 살고 있는 세계에 속하면서 그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젊고 건강한 그녀의 삶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진짜 삶은 비밀로 남아있다. 비록 그녀는 살아 있으나 다른 의미에서 그녀는이미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그녀의 한숨을 들을 수가 없다. 그녀의 한숨은 그녀의 영혼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고 K는 말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유약하고 병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다른 이가 아닌 자신이 이 고통을, 이 비밀을, 이 의무를 - 자신의 아버지의 명예와 영광을 돌려 주어야 한다는 의무 - 자신이 감당하도록 선택되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K는 말한다. 이 안티곤은, K에게는 우리에게 익숙한 그의 말로 옮기면,  믿음의 기사 cheval!ier de foi일 것이다. 


필로테트가 누구도 자신의 고통을 모른다고 불평할 때, 이것은 그리스 정신에 일치한다. 이것은 다른 이들이 나의 고통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인간적 필요를 드러낸다. 그런데 이 괴로움은 전혀 반성된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그녀의 고통을 알아주기를 욕구하는 것은 안티곤에게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그녀가 겪는 고통인 것이다. 그녀는 이 고통 안에서 정의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벌이 정의로운 것처럼, 이 고통도 미적으로 정의롭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에서, 이러한 상황은 산자를 파묻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표현될 뿐이다.  그래서 소포클레스는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사람과 그늘로부터 동시에 분리되어 있는 / 산자와 죽은자로부터 동시에 분리되어 있는/ 아! 이 불행! (850)


살아있으나 산 것이 아닌 이 생각은 물론 안티곤의 주제이다. 그러나 여기서 - 고대의 이 생각와 안티곤의 경우 - 그 차이는 두드러진다. 위의 말들이 안티곤을 표현한다면 고유하게가 아닌 비-고유하게 그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에서 이 반성은 여전히 외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이 반성은 비극의 주인공의 삶 안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고 K는 말한다. 필로테트에게 혼자 버려져 있음은 외적인 진실인 반면, 안티곤에게 이 혼자임이라는 사실로 인해, 이 괴로움은 그녀 안에서 내적인 진실이 된다.


K는 안티곤에서 헤겔의 변증법의 정신의 운동의 추상성과 다른 낯선 변증의 운동을 보여준다. 안티곤에서 비극적 잘못은 이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안티곤은 그의 오빠를 장사지낸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이 사실과 연결되어 있는 그의 아버지의 슬픈 운명이 겹쳐있다. 다시 말해, 한 개인과 가족의 죄가 이상하게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한 개인의 잘못이 아닌 세대를 이어서 내려오는 죄이다. 헤겔의 논리적인 운동과는 다르게 여기에는 세대를 거쳐서 내려오는 이전 세대의 유산이 고스란히 한 개인 안에 간직되어 있다. 이 유산은 각각의 개인에게 고유하게, 그 개인에게만 고유하게 관계한다. 이 고통을 이 의무를 우리는 아무에게도 전가하지 않는다. (이 책임은 전적으로 나의 것이며, 누구에게도 전가할 수 없는 나의 고유한 일이다) 이 유산은 나의 일이며, 나 이외에 다른 이에게 전가되어 질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고대의 비극은 한 개인 안에서 다시 태어나며, 그 안에서 각각의 개인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다시 태어난다. 


K의 안티곤은 그가 표현하듯이 자신의 심장 안에 자신의 비밀을 간직한다. 이 비밀은 마치 에파미논다스의 화살처럼 그녀의 삶 안에 빼어낼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박혀있다. 이 화살이 꽂혀 있는 동안 그녀는 살아 있을 것이며, 화살이 뽑혀지는 순간 그녀는 죽을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 - 원죄 - 은 그녀를 살게 하는 동시에 그녀의 죽음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 비밀의 영역, 주체성은 K가 고대의 비극적 잘못을 근대적 의식 안으로 내면화하면서 얻어진 것이다. 이 주체성은 트로마티즘으로서의 주체성과 멀리 있지 않으며, 카프카의  주인공들과 멀리 있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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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모네의 정원
글쓴이 : Auror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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