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 있는 세계

저자와 번역가

김남시 2009. 4. 7. 20:21

 

한병철 선생의 책을 번역한다. 한병철 선생은 한국사람(sic!)으로 한국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후 프라이부르크와 뮌헨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한 독특한 경력을 가졌다. 프라이부르크에서 하이데거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 사람으로서는 드물게 바젤 대학에서 철학 교수 자격 논문까지 마친 그는 지금까지 독일의 유명 출판사들에서  10 여권의 철학책들을 출간하였다. 공식적으로 바젤 대학 철학과 강사로 있지만 그는 독일의 다른 여러 대학에서도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한 선생의 책을 번역하기로 한 한국의 출판사는 한참동안 그를 번역할 번역자를 찾았으나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하였다. 그건 한국에 독일어 인문학 책을 번역할 만한 번역자가 없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거기엔 번역을 둘러싼 한국의 사회적 상황이 작용하였다. 한국에서 번역 작업이, 특히 초판 부수 이상 판매를 기대할 수 없는 인문학 서적은 더욱 더, 번역자의 노고를 보상해 줄 만큼의 경제적 댓가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건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번역자가 번역의 수고를 감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른 조건이 들어 맞아야 한다. 예를들자면 그 작업이 번역자의 학문적 경력에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런데, 학문에서도 유명세가 결정적 역할을 하는 한국에서 유명한 서양 인문학자도 아닌 한국 태생의 한 독일 철학자의 책을 번역한다는 것은 그 조건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번역료를 특별히 많이 받는 것도 아니고, 그 번역 성과가 특별히 활용될 수 있는 것도 아닌 이 번역을 위해 어떤 번역자가 팔을 걷고 나서려 하겠는가.

 

하지만 출판사가 한 병철 선생 책의 번역자를 찾지 못한 더 큰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건 이 책의 저자인 한 선생이 한국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이 책의 저자가 자신의 번역을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에대해 저자로써 평가하고 비판하며, 경우에 따라선 수정을 요구할 수 있는 살아있는한국 사람이라는 것은 번역자에겐 그리 달가운 사실만은 아니다. 여기서 번역자는 자신의 번역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충실한지 아닌지를 직접 그 저자에 의해 평가받는 부담스러운 위치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저자와 번역자 사이에는 늘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관계가 존재한다. 오리지널로부터 번역의 자립성을 얼마나 인정할 것인가에 따라 그 관용성에 대한 양적 차이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원리적으로 번역은 오리지널 텍스트에의 충실성을 요구 받는다. 쓰여진 글을 저자의 부재 혹은 저자의 죽음으로 성격지우고 문자의 반복성(Iterabilität)에만 의거한 자유로운 컨텍스트화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데리다 (J. Derrida : Signatur Ereignis Kontext, in Randgänge der Philosophie, Wien 1988) 의 논의를 예외로 친다면, 번역이란 오리지널 텍스트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른 언어의 말하기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발터 벤야민)이라고 말하건, „번역이란 직접 화법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간접화법“(움베르토 에코, Quasi dasselbe mit anderen Wort. Über das Übersetzen, 2003) 이라고 말하건, 어쨋든 오리지널 텍스트에 대해 번역은 시간적으로는 물론 존재론적으로 2차적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서로 다른 언어들의 상이성으로 인해 오리지널에의 맹목적 충실함을 요구하는 것이 도리어 우스꽝스러운 역효과를 불러내기는 하지만 움베르토 에코가 위 책에서 들고 있는 사례를 예로 들자면 It’s raining cats and dogs를 원문에 충실하게“ „고양이와 개가 쏟아져 내린다라고 번역하는 경우 - 이러한 상황에서 번역자에게 허용되는 번역 언어 내에서의 창조적인 해결방법은 그럼에도 오리지널을 넘어서지는 않는’ „타협에로 제한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오리지널 텍스트에 대한 번역자의 관계는 마치 왕의 명령을 지방 관료에게 전달해야 하는 전령과도 같다. 왕의 명령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는 자기 자신의 현존과 가시성을 최소화시켜야만 한다.

 

오리지널 텍스트와 번역자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관계는 그 텍스트의 저자가 살아있을 경우, 나아가 그가 직접 자기 텍스트의 번역을 읽고, 평가할 수 있는 경우, 그를통해 저자가 번역에 대해 저자 Author로써의 Authority 를 발휘할 수 있는 경우엔  번역자에겐 직접적이고,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가시적 권력 관계로 현상한다. 이러한 권력관계를 견디지 못한다면 번역자는 그  번역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한병철 선생의 책 그 책의 제목은 권력이란 무엇인가?“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 이 지금까지 번역자를 찾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번역을 떠 맡게 되었을까?

이 책의 번역이 이런 우여 곡절을 통해 나에게까지 넘겨지게 된 데에는 물론 한 선생과 나와의 개인적 만남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의 책들을 통해 이름만 알고 있었던 한 병철 선생을 내가 직접 만난 게 된 계기는, 한 선생이 최근에 출간한 책 Abwesen. Zur Kultur und Philosophie des Fernen Osten (Merve)의 서평을 위해 그를 인터뷰했던 독일인 저널리스트가 나의 친한 지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독일인 만큼이나 큰 키에 긴 머리를 한 가닥으로 모아 뒤로 묶고있는 한 선생은 79학번이라는 나이답지 않게 무척 젊어 보인다. 한국어 절반 독일어 절반으로 이루어지는 그와의 대화를 통해 나는 독일의 인문학계 Geisteswissenschaft가 그 Geist의 보편성에 대한 원리적 요구와 모순되게도 그를 대학에서 가르칠 수 있는 자격에 대해서는 암묵적인 특수성의 장벽을 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인이나 중국인이 한국학이나 중국학 뿐 아니라 철학과 인문학도 가르치고 있는 미국 대학에 비해, 독일 대학은 아직까지도 한국인이 독일 대학에서 독일철학을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한 선생이 모든 자격을 갖추고도 철학과 강사로만 머물러 있는 건 독일 인문학의 인력감축 정책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이로인해 그는 그가 학위와 교수자격을 얻고, 그 언어를 통해 사유하고, 그 사유를 사유하며 살아가고 있는 독일 땅 한가운데에서 섬처럼 부유하는 이방인이다. 이방인으로서의 그의 삶의 조건은 그가 그의 노모가 살고있는 한국으로 이제 다시 돌아온다고 해서 해소되지 않는다. 텃세 심한 한국의 철학계가 이국을 떠돌다 돌아온 한 무명 철학자를 위해 그렇지않아도 비좁은 자리를 내어줄리 만무할 뿐더러, 그의 오랜 부재는 한국에서도 이방인이 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시간의 흔적을 그에게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어쨋든 한 선생이 내게 자신의 책의 번역을 제안했을 때 그의 책이 한국에서 번역 출간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나의 응답 하나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결정이 유일하게 남은 단 하나의 가능성일 때 그를 거절할 만큼 강하지 못하다.

 

현재 번역하고 있는 한 선생의 책은 하지만, 권력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준다. 권력을 우리의 자유를 가로막고, 억압하는 반 의지로만, 따라서 그에 저항해 싸우고, 물리쳐야만 하는 어떤 폭력으로만 알아온 나에게 어쩌면 한국의 현대사를 겪은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오히려 무엇인가를 생성시키고, 조직하며, 살아가게 하는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권력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를통해 실지로 작용하고 있는 권력의 실체에 보다 더 현실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권력에 대한 부정적 체험을 지배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는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낼 위험도 가지고 있다. 나는 어쩌면 이 책의 저자가 그의 부재로 인해 체감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이러한 상황과 그 속에서 그의 책이 맞닥뜨려야 할 도전들을 그에게 상기시켜주었고, 한 선생은 그에 동의하여 이 책의 한국어 판 서문에서는 그로부터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번역자는 오리지널 텍스트의 충실한 전령이어야 한다는 것은 번역자가 텍스트를 기계적으로 다른 언어로 옮기는 번역기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저자는 알고있지 못할 번역어의 사회가 갖는 사회, 정치, 문화적 맥락을 그 텍스트의 번역에 고려하는 것은 번역자만이 담당할 수 있는 중요한 임무일 것이다. 살아있는 저자와 번역을 둘러싸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이러한 점에선 큰 장점이다. 부재하거나 죽은 저자가 오히려 그 부재로 인해 더 큰 권위를 가지는 경우, 번역자가 감수해야 하는 권위적 제한들은 더 강할 수도 있다. (2009년에 세익스피어를 번역하는 번역자를 생각해 보라!) 현존하면서 살아있는 지금, 현재의 저자와 대화하면서 번역할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생기지 않는다. 난 이 새로운 실험에 기꺼이 동참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