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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4일) 권위적 아버지, 비 권위적 아버지

김남시 2009. 4. 5. 00:45

개인사정으로 인해 원래 날짜보다 많이 늦어졌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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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가 된다는 운명이다. 그건 프로이드가 해부학적 차이가 운명이라고 말했던 것보다 어쩌면 운명적으로 아이에게 자유 대신 규율과 법의 내면화를 요구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로서의 자신이 아이에게 개인적으로, 개별적으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권위와 엄격함을 통해 가부장적 질서를 명령하던 이전 시대의 억압적 아버지가, 명령하는 대신 설득하고 자유를 억누르는 대신 선택하게 하려는 권위적 아버지로 변화했다 하더라도, 아버지로서의 그런 실존적-사회적 임무는 바뀌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자신이 그런 임무를 띄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지 못하면서도 사회에 여전히 금지와 법이 – ‚아버지의 이름으로’ - 작동하도록 활동하는 비밀 특수 요원들이다.  예를들어,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억압적인 권위의 붕괴가 우릴 자유롭게 하는 대신 새로운 엄격한 금지를 탄생하게 한다.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젊었을 때부터 우리에게 익숙해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일요일 오후 친구들과 노는 대신 할머니를 방문해야 하는 불행한 아이가 있다. 그걸 하기 싫어하는 소년에게 던지는 구식의 권위적 아버지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 „네가 어떻게 느끼건 상관하지 않는다. 그냥 의무를 해라. 할머니한테 가서 처신해라!“ 경우 아이가 처한 상태는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다. 아이가 자신이 하기 싫어하는 무엇인가를 하도록 강요받는다는 분명하지만 아이는 자신의 내적인 자유와 (나중에) 아버지의 권위에 반란을 일으킬 있는 능력을 보존할 것이다. „포스트모던 -권위적인 아버지의 메시지는 이보다 교묘하다. „할머니가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너도 알잖니! 그래도, 나는 강요하고 싶지않다. 정말로 네가 원한다면 할머니를 방문하거라!“ 멍청하지 않은 아이라면 누구든지 (말하자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런 관대한 태도의 계략을 금새 알아차릴 것이다. 여기에선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가상 아래 전통적인 권위적 아버지에 의해 행해진 것보다 억압적인 요구가 존재한다. , 할머니를 방문하라고 뿐만 아니라 그를 자발적으로, 아이의 자유의지에 의해 행하라고 하는 명령이. 이러한 허위적인 자유 선택이 외설적인 초자아의 명령이다. 그것은 아이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할 아니라, 무엇을 원하라고 지시함으로써 아이의 내적 자유를 강탈해 간다.“ (Slavoj Zizek, How To Read Lacan, 92-93.)

 

- 지젝의 책이 어떻게 하면 자유를 억누르지 않으면서 아이를 키울 것인가에 대한 육아 지침서가 아니라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가 금지와 지배, 넓은 의미에서의 권력의 문제를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전통적인 모델에 의거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모델이 지배와 자유, 권력과 억압의 사회/문화적 문제들을 사고하는데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프로이드가 오이디프스 컴플렉스라는 삼각관계 통해 터를 잡아 놓았던 아버지= 금지, 억압, 초자아, 자유의 강탈이라는 등식은 이제 프로이드 시대의 역사적 조건에서 벗어나 지젝에게서 이전보다 교묘하고 계략적이 오늘날의 억압과 금지를 설명하기 위한 모델로까지 확장된다. 그리고, 그를통해 그렇지 않아도 이미 현존 자체로 인해 아이의 욕망의 가장 위협자였던 아버지라는 존재는 외관상의 변화된 모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의 내적 자유를 강탈하고 사회적 초자아를  강화시키는 자유의 억압자로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아이를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이 금지와 억압의 원천이 되어버리는 이런 아버지의 운명에서 벗어날 있는 길은, 내가 보기엔, 두가지다. 하나는 아버지가 되지 않는, 다시말해 아예 자식을 낳지않는 니힐리즘적 탈주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해서 자식이 생겼다면 육아와 양육을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위임하는 모계적 대안이다. )

 

-          금지와 지배의 문제에 접근하는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모델은, 그것이 근거하고 있는 정신 분석학의 성격 자체에서 연유하는 사후성 Nachträglichkeit’ 특징을 지닌다. 아버지의 법과 질서를 내면화 아이에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그가 그러한 사회화 과정을 거친 이후이다. 아이가 나중에 권위적 아버지에게 반란할 능력을 키우건, 자신이 원하는 조차 아버지의 이름으로 선택하게 되건, 아이에 대한 아버지의 관계가 문제가 되는 아이가 성장하고 이후에 발생한다. 말하자면 아이들에 대한 아버지의 지배는 사후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지금과 현재 상황, 그가 권위적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강요받거나, 포스트모던한 권위적 아버지의 관대한 태도에 맞서는 상황 자체의 적절성/정당성은 그것의 사후적 결과를 통해 판정된다. 우리의 초점을 아이의 지금과 현재 맞춘다면, 아이는 자신에게 위압적으로 명령을 내리고 복종하기만을 요구하는 권위적 아버지 보다는, 아이의 의향을 고려해주려는 권위적 아버지의 메시지를 공포스럽고, 억압적으로 느낄 것이다. 하지만  사후적 결과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리고 관점을 따르고 있는 지젝에 의하면 나중에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킬 능력을 보존하게 준다 점에서 오히려 권위적 아버지가 권위적 아버지보다 낫다.  

 

-           지젝의 이런 주장/분석/판단이 억압적이고 권위적 문화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그런 권위적 아버지의 문화를 해체하고 자유화시키려던 68세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간파할 있다. 현재의 금지와 억압의 문화가 권위적인 부모와 그것의 사회적 연장으로써의 사회  제도와 국가의 사회화 과정에서 기인한다는 인식은  68세대의 권위주의적 개혁 운동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마르쿠제의 정신 분석학적 저술들이나 당시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권위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 육아/교육 개혁이론 – Alice Miller! – 등에서 확인할 있는 이러한 권위주의적이고 개혁적인 흐름이  6/70년대까지의 권위주의적인 구식 아버지를 포스트모던한 권위주의적 아버지 변화시키는 커다란 공헌을 했다는 누구라도 인정할 있는 사실이다. 지젝은, 세대들의 노력이, 그러나 그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오히려 과거의 권위적 아버지보다 계략적으로아이의 내적 자유를 강탈하고,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가상 아래 억압적인 요구 낳는 포스트모던 권위적 아버지를 낳았다고 말하고 있다.  

 

-          사후적 결과 지금/현재사이의 편차는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삶의 시간을 동시에 접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어려운 판단과 결단의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현재행하고 있는 행동이 사후적으로어떤 결과로 이어지게 될지, 그것이 나중에 어떤 역사적 판단을 받게될지 알지 못한다. 이러한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현재 삶을 어떤 식으로든 살아가지 않을 없다. 더구나 지금/현재 삶을 살아보려는 사람들에게 이는 매우 어려운 판단의 문제를 제기한다.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에게 예를들어 문제는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지금/현재아이에게 권위적으로 대할 것인가 아니면 강요하거나 명령하지 않는 권위적 태도를 취할 것인가. 질문에 대해 지젝의 인용문은 어떤 대답을 있을까.  아이에게 내적인 자유와 나중에 아버지의 권위에 반란을 일으킬 있는 능력을 보존시켜주기 위해선 차라리 억압적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 낫다는 것일까? 우리가 붕괴시켰던구식의 권위적 아버지가, 지금 생각해보니, 사실 우리의 내적 자유와 반란의 가능성을 보존시켜 주던 좋은 아버지였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현재는 비록 서로에게 조금 언짢겠지만 아이가 아버지의 권위에 저항할 있는 능력 가질 있도록 엄격하고, 권위적으로 아이를 대해야 한다는 것일까? 생각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예를들어 날이 추운데도 스타킹을 신지 않으려는 아이를 스타킹 신어!“라는 한마디 명령을 통해 움직일 있기를 원하는 나같은 아버지에겐 무척이나 유혹적이다.

 

-          생각을 조금 , 지젝에 대한 악의를 곁들여 발전시켜보자면 우리는, 과거의 권위적 아버지들이 그렇게 권위적이었던 것은 어쩌면 그를통해 우리에게 나중에 그들에게 저항할 있는 능력 남겨주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젝 자신은 자신의 아들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그는 위에서 말한 모계적 대안 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자식들에 대한 자신의 권위적 태도를 이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아가 믿을 없는 제스쳐로 언론과 교육을 탄압함으로써 분명히 멸종된 것으로 여겼던 7-80년대의 망령을 다시 현실화시키고 있는 (아쟈비, „우스꽝스러운 숭고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이명박 정권은, 사실은 그를통해 그동안 안이해져 버렸던 우리 태도에 경각심을 일깨워 나중에 거기에 저항할 있는 능력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우스꽝스러운질문들이 제기되는 것은, 금지와 지배와 자유의 억압이라는 문제는 우리가 발생론적 문제를 따지고 있는 지금/현재에도 계속해서 작동하고 있는 현재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