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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3일자) 쟈크 랑시에르의 정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김남시 2008. 12. 20. 02:32

자크 랑시에르의 (Das Unvernehmen. Politik und Philosophie, Shurkamp) 읽었다. 랑시에르는 예상보다 훨씬 급진적이다. 그가 내세우는 정치적 요구는, 예를들어 데리다가 환대라는 개념을 통해 말하는 것처럼,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도래할 모르는 타자/손님들을 언제든지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소극적인 윤리적 요구를 훨씬 넘어선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정치, 현존하는 치안적 질서에 따른 사회적, 정치적, 나아가 감각적인 것의 분배 구조에는 근본적으로 낯선’, 질서 속에선 아무 자기 몫도 배당받지 못한 자들이 주체화를 통해 자신들의 몫을 요구하고 나설 비로소 시작된다. 그가 말하는 정치 현존하는 사회의 치안적 질서, 그것이 마련해 놓은 분배/분할의 구조 속에서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자 Anteilose’들이 자신의 몫을 요구하고 나서기를, 그를통해 기존의 치안적 질서의 재편을, 자리바꿈을 요구한다. „정치적 활동이란 육체에게 부여되어 있던 장소로부터 그를 떼어놓거나 장소의 규정을 변화시키는 활동“ (41)이며, 그를통해 기존 질서의 절대적인 우연성을 폭로하고, 기존 질서의 변화와 자리바꿈“(이재원, 쟈크 랑시에르와 68혁명이 유산을 생각한다. <자음과 모음> 2008 겨울호)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정치적 요구는 예를들어 임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악덕 사업주에 대해 투쟁하거나, 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시민적 권리를 얻기 위해 싸우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정치, 사회 운동의 요구를 넘어선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현재의 사회, 정치적 질서가 구획하고, 속에서 각자에게 배당해 놓은 자기 몫을 찾기위한이러한 정치적 운동은 그런 점에서 오히려 현존하는 사회, 정치적 질서와 구획, 그것의 나눔의 구조를, 치안적 질서를 강화시키는데 기여할 있다. 현존하는 분배/분할의 질서가 자신에게 배당해 놓은 몫을 요구하는, 그래서 결국엔 자기 몫을 가지고 있는 Anteilhabende’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노동운동이나 시민 운동이 어떤 지점에서, 현존하는 분배/분할의 질서에 의해 아무 자리도, 아무 몫도 배당받지 못하고 있는, 예를들어 외국인 노동자, 난민, 불법 체류자들  같은 자기 몫을 갖지 못하는 자들 Anteilosen’ 대립하는 것도 바로 때문이다.

 

기존 질서에는 아예 소속되어 있지도 않으며, 속에서 아무 장소도, 위치도, 몫도 분배받지 못하던 존재들, 그리하여 질서에는 근본적으로 낯선자들이 그럼에도 자신의 몫을 요구할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예를들어 나라의 시민권도 가지고 있지 못하고, 그로인해 법으로 보장된 어떤 사회적 권리도 갖고 있지 못한 난민, 불법 체류자, 혹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몫을,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랑시에르에게 있어 그것은 모든 말하는 존재가 다른 말하는 존재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동등함/평등 Gleichheit(42) 있다. 그리고 평등/동등함 랑시에르에게는 어떤 활동이 정치적 성격을 갖기 위해선 반드시 의거해야 하는 근본 원리이다. „정치는 자체에 고유한 대상이나 질문들을 갖지 않는다. 정치의 유일한 근본 원리인 평등/동등함은 정치에 고유한 것이지도 않으며 자체로 정치적인 것도 아니다. 정치가 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구체적 사안이라는 형태로 평등/동등함의 현재성을 부여하는 것이며, 투쟁이라는 형태로 치안적 질서의 심장 속에로 평등/동등함을 기입/등록해 넣는 것이다. 하나의 활동의 정치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활동의 대상이나, 그것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투쟁,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데 평등/동등함의 확인을 기입/등록해 넣는 그것의 형태이다.“(43) 다시말해 랑시에르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정치적 활동이란 그것이 무엇을 대상으로 하건, 어떤 문제를 이슈로 삼건 상관없이, 그를통해 기존의 치안적 질서 내에선 보이지 않고 있던평등/동등함에의 요구를 제기함으로써 기존의 분배/할당 구조의 자리바꿈을 요구하는 활동이다.

 

홉스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공식을 통해 암시했던 말하는 존재들 사이의 이런 근원적 평등은, 랑시에르에 의하면 명령하는 자와 그에 복종하는 자의 관계를 통해 유지되는 질서의 가능 근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서는 명령을 이해할 있어야 하며, 또한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를 행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복종하는 자와 명령하는 자가 이미 동등해야만“(29) 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권력관계, 명령하고 복종하는 질서 자체를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이전의 근원적 동등함/평등에 의거해 이야기하고 있는 랑시에르는 점에서 모든 권력 관계와 질서가 이미 출발에서부터 폭력적 억압에 기인하고 있으며, 따라서 모든 지배와 질서를 거부하는 아나키스트들과는 구분된다. 랑시에르는 아무런 권력 관계와 질서도 존재하지 않는 상상적 정치적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특정한 권력 관계와 질서가 유지될 있게 하는 근거로서의 근원적 평등 권력관계와 질서의 개혁과 변화를 가능케 하는 규범적 근거로 삼으려고 한다. 존재하는 권력의 힘과 질서를 다만 그를 행사하는 권력자의 일방적인 폭력이 아니라, 최초의 동등함/평등 상태에서 스스로를 권력에 종속시키고 복종하는 자들의 자유에 의거한 자발성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내가 보기에 랑시에르는 라클라우/무페가 전개시키는 헤게모니 이론과도, 지배 이데올로기가 힘을 갖고 영향을 발휘하는 이유가 본질적으로는 비어있는 어떤 질서와 법에 우리 스스로가 부여한 어떤 초월적 힘과 의미 때문이라고 말하는 지젝의 논의와도 통해 있다. 나아가 우리는 이를 자발적 동의에 기초해 있는 권력 폭력으로부터 구별하는 한나 아렌트의 권력 이론과도 연결시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과 랑시에르 사이의 근본적 차이점이 있다면, 랑시에르는 하나의 권력과 질서가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권력과 질서에 복종하는 자들의 근원적 동등함/평등에 대한 요구를 일국적 차원을 넘어서까지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동등함/평등에 대한 요구는, 처음부터 그런 동등함/평등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는 국가 내의 시민들이 아니라, 그런 법적, 정치적, 사회적 질서로부터 아무 자리도 배당 받고 있지 못한 자들에게로까지 확장된다. 국가의 시민으로서 앞에서의 평등함이 아니라, 말하는 존재로서의 평등함/동등함에 대한 요구. 국가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질서 내에 어떤 자리도 갖고 있지 않은 자들이라도 요구할 있고, 요구해야 하는 평등함. 오늘날 유럽 사회에서 랑시에르의 이러한 정치적 요구가 가장 분명하게 적용될 있는 대상은 유럽에 체류하고 있는 난민이나 불법 이주자 아니라, 하루에도 수십명 수백명씩 마로코, 튜네지아, 알제리, 소말리아에서 부터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횡단해 꿈꾸던 나라 유럽대륙으로 몰려오고 있는 보트 피풀들이다. 현존하는 일국적 체제에 의해, 다만 유럽적 차원으로 확장된 배타적 일국체제 유럽 연합이라는 정치단위에 의해서는 아무 자리도, 아무 몫도 할당받고 있지 않은, 아니 오히려 유럽의 안정과 복지, 번영을 위협하는 존재로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아야 ’, 그래서 끊임없이 추방되고 되돌려보내지는 이들이야말로 현재 유럽 사회의 질서 속에서 배제되어 있는 자기 몫을 가지고 있지 못한 자들 Anteilose’이기 때문이다.

 

유럽사회에서 이들은 지금까지, 목숨을 항해와 갈증과 허기와 조난으로 죽어간 희생자들의 모습으로, 죽음 직전까지 탈진해 유럽해안에 도달해 해변에서 관광을 즐기던 유럽인들의 보살핌을 받는 불쌍하고 고통받는 희생자 모습으로 재현되어 왔다. 그리고 고통받는 희생자들에게 유럽의 시민 사회는 적지않은 휴머니즘적 원조와 자선을 베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랑시에르에 따르면 우리와 같은 인간 고통에 대한 동감과 선한 의지 근거하고 있는, 소위 휴머니즘 논리에 의거해 이루어지는 이러한 자선 활동은 전혀 정치적 활동이라고 여겨질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휴머니즘적 자선활동은 그들이 스스로를 정치적 존재로 주체화할 있게 하는, 바로 거기에 위에서 말한 근원적 평등/동등함이 근거하고 있는 말할 있는 능력 가진 존재로 인정하기 보다는, 다만 그들을 자신의 벌거벗은 고통을 드러내는 목소리 가진 존재로 제한시키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34-135) 정당함과 부당함, 좋음과 나쁨을 구별하고 말할 있게 하는 말하는 능력 Logos’ 박탈하고, 그들을 다만 고통을 느끼고 표현하는 목소리만을 가진, 그래서 도와주워야 희생자로만 만듦으로써 이러한 활동은 그들에게서 정치적 존재로서의 자격을 빼앗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유럽 아니라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점점 수가 늘어나고있는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자들’, 예를들어 이주 노동자, 결혼 이민자, 혹은 불법 체류자들이 공장주에게 구타당하고, 남편에게 폭행받고, 심각한 인종차별을 받는 희생자 등장하는 , 우리는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들이 받은 피해에 함께 분노하며 그들을 기꺼이 도와주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이 스스로를 주체화하여 한국사회가 그들에게 분배/할당하지 않았던, 그래서 전혀 예상하지도 못하고 있던 어떤 Anteil 요구해 온다면? 말하는 존재로서의 근원적 평등/동등함에 근거해 정치적으로 주체화된 이들이, 한국 사회의 분배/할당 구조 내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몫을 배당받고 있는 Anteilhabende’ 우리에게까지 몫을 재분배하고, 자리바꿈을 요구해 온다면? 우린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들과 연대할 있을까? 우리가 우리의 위치를, 위치를 보장해주던 질서와 나눔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려 하는 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오히려 이들의 뻔뻔스러움을, 나아가 배은망덕을 이야기하면서, 애초에 우리가, 치안적 질서가 그들에게 마련해 놓았던 규정 ,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Anteilose’ 정체성을 그들에게 상기시키려 것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듯, 모든 정치적 주체화는 이처럼 지금까지의 우리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재조직하고, 나눔/할당의 구조를 분배하고, „지금까지 헤아려지지 않던 것을 헤아리고, 몫의 부재와 몫을 서로 관계시키는 정체화 Ent-Identifizierung „(48 ) 요구한다. 지금까지의 정치/사회 운동이 우리에게 할당되어 있는 요구해왔다면,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는 우리가 자신의 몫을 가지지 못한 자들 정치적 주체화에 대해 우리 자신의, 결코 쉽지않을  정체화를 통해 응답하기를 요구한다. 우린 그렇게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