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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크 랑시에르에게서 정치

김남시 2008. 12. 18. 06:25

자크 랑시에르의 Das Unvernehmen. Politik und Philosophie, 2002 Shurkamp 읽었다. 랑시에르는 예상보다 훨씬 급진적이다. 그가 내세우는 정치적 요구는, 예를들어 데리다가 환대라는 개념을 통해 말하는 것처럼,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도래할 모르는 타자들을 언제든지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어떤 점에서는 소극적인 윤리적 요구를 훨씬 넘어선다. 그가 말하는 정치 현존하는 사회의 치안적 질서, 것이 마련해 놓은 분배/분할 속에서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자 Anteilose들이 자신의 몫을 요구하고 나서기를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그건 기존의 치안적 질서의 재편을, 자리바꿈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요구는 예를들어 임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사업주에 대해 투쟁하거나, 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권리를 얻기위해 싸우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 행사를 방해하는 공권력에 맞서 싸우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정치운동을 훨씬 넘어선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이런 의미에서의 정치적 운동이란,  이미 현재의 사회적, 정치적 질서가 구획하고, 속에서 각자에게 배당해 놓은 몫을 요구하는 것일 뿐이며, 그런 점에서 그런 정치적 운동은 오히려 현존하는 사회적, 정치적 질서와 구획을, 그리하여 치안적 구조를 강화시키는데 기여할 뿐이다. 기존의 노동운동이나 시민 운동이, 현존하는 분배/분할의 질서가 명목상으로라도 마련해 놓은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데만 집중한다면,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현존하는 분배/분할의 질서에 의해 아무런 자리도, 아무런 몫도 배당받지 못하는, 예를들어 외국인 노동자나 이주민들과 같은 자기 몫을 갖지 못하는 자들 Anteilosen’ 그로부터 배제시킬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질서가 마련해 주는 자신의 몫이, 결국 자기 몫을 갖지 못하는 자들 대한 배제에 기인하고 있는 , 자신에게 할당된 몫을 찾고자 하는 운동은 질서를 공고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정치, 현존하는 치안적 질서에 의해 마련되어 있는 사회적, 정치적, 나아가 감각적인 것의 분배 구조에는 근본적으로 낯선’, 질서 속에선 아무런 자기 몫도 배당받지 못한 자들이 주체화를 통해 자신들의 몫을 요구하고 나설 비로소 시작된다. 그를통해 정치적 활동이란 육체에게 부여되어 있던 장소로부터 그를 떼어놓거나 장소의 규정을 변화시키는 활동“ (41)이며, 그를통해 기존의 질서의 절대적인 우연성을 폭로하고, 기존 질서의 변화와 자리바꿈을 요구하는 것이다.(이재원, 쟈크 랑시에르와 68혁명이 유산을 생각한다. <자음과 모음> 겨울호 2008)


기존 질서에는 아예 소속되어 있지도 않으며, 속에서 아무 장소도, 위치도, 몫도 분배받지 못하던 존재들, 그리하여 질서에는 근본적으로 낯선자들이 그럼에도 자신의 몫을 요구할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랑시에르에게 있어 그것은 모든 말하는 존재가 다른 말하는 존재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동등함/평등 Gleichheit(42)이다. 홉스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공식을 통해 암시했었던 이런 근원적 평등은, 명령하는 자와 그에 복종하는 자를 통해서 유지되는 질서가 존재할 있게 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서는 명령을 이해할 있어야 하며, 또한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를 행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복종하는 자와 명령하는 자가 이미 동등해야만“ (29) 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현존하는 권력관계, 명령하고 복종하는 질서 자체를 이전의 근원적 동등함/평등에 의거해 이야기하고 있는 , 그는 모든 권력 관계와 질서가 출발에서부터 불평등한 억압과 착취에 기인하고 있다고 말하는 아나키스트와는 구분된다. 랑시에르는 모든 권력 관계와 질서도 존재하지 않는 정치적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특정한 권력 관계와 질서가 유지될 있게 하는 근거로서의 근원적 평등 권력 관계와 질서의 민주주의적 개혁을 가능케 하는 규범적 근거로 삼으려고 한다. 존재하는 권력의 힘과 질서를 다만 그를 행사하는 권력자의 일방적인 폭력이 아니라, 최초의 동등함/평등 상태에서 거기에 스스로를 종속시키고 복종하는 자들의 자유에 의거한 자발성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내가 보기에 랑시에르는 라클라우/무페가 전개시키는 헤게모니 이론과도, 지배 이데올로기가 힘을 갖고 영향을 발휘하는 이유가 본질적으로는 비어있는 어떤 질서와 법에 우리 스스로 어떤 초월적 힘과 초월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지젝의 논의와도 통해 있다. 나아가 우리는 이를 자발적 동의에 기초해 있는 권력 폭력으로부터 구별하는 한나 아렌트의 권력이론과도 연결시켜 있을 것이다.



어쨋든 랑시에르에게 있어 평등/동등함 하나의 활동이 정치적 성격을 갖기 위해 반드시 의거해야 하는 근본원리이다. „정치는 자체에 고유한 대상이나 질문들을 갖지 않는다. 정치의 유일한 근본 원리인 평등/동등함은 정치에 고유한 것이지도 않으며 자체로 정치적인 것도 아니다. 정치가 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구체적 사안이라는 형태로 평등/동등함의 현재성을 부여하는 것이며, 투쟁이라는 형태로 치안적 질서의 심장 속에로 평등/동등함을 기입/등록해 넣는 것이다. 하나의 활동의 정치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활동의 대상이나, 그것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아니라, 다만 하나의 투쟁,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데 평등/동등함의 확인을 기입/등록해 넣는 형태이다.“ (43)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평등함, 노동자로서의 평등함이 아니라, 말하는 존재로서의 평등함/동등함에 대한 요구. 그래서 국가에 속한 시민이 아니더라도, 직장에 소속된 동료직원이 아니더라도, 질서들 내에 어떤 자리도 갖고 있지 않은 자들이 요구할 있는 평등/동등함. 유럽 사회에서 랑시에르의 이러한 정치적 요구가 겨냥하고 있는 대상은 누구보다도 유럽에 밀려들어오는 이민자나 난민, 불법 이주자, 그리고 여기 살고있는 불법 체류자들이다. 현존하는 일국적 Naton 체제에 의해, 사회 내에서 아무 자리도, 아무 몫도 할당되어 있지 않은, 아니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있는 이들이 정치적 주체화를 통해 바로 사회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랑시에르가 이야기하는 정치는 가장 분명한 형태로 드러나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