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 있는 세계

슈레버 메모2. 지각과 믿음.

김남시 2008. 12. 2. 20:41

 

1894 7월 초 어느날 밤 다니엘 파울 슈레버는 믿기지 못할 만큼 강렬한 체험을 한다. 처음으로 후방의 신의 나라가 그 신(아리만, 오르무즈트)과 더불어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눈을 부시게 할 만큼 압도적으로 화려한 빛이 하늘 전체를, 그의 증언에 의하면 6할에서 8할을 뒤덮고 있었고 이 현상은 며칠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 다음날 오후 정기적으로 병원 정원을 산책할 때에도 슈레버는 하늘에서 품어져 나오는 이 압도적인 빛을 관찰할 수 있었다. 슈레버에 의하면 그 때 자기 옆에는 그를 담당하던 간병인 M만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하늘을 뒤덮고 있던 압도적인 빛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놀라움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왜 그랬을까? 하늘의 8할을 뒤덮고 며칠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빛을 그가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어 목격하지 못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간병인 M은 그에대해 왜 일언 반구의 놀라움도 표현하지 않았을까?


            슈레버의 이 의문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다. 그건 자신의 했던 지각의 객관성에 대한 질문이며, 이는 이와 다른 방식으로는 제기될 수 없다. 우리 자신도 예를들어 어떤 보기드문 것을 보거나 듣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자기 주변의 다른 누군가도 그를 지각했는지를 확인할 것이다. 누군가가 내 곁에 있었고, 또 그 역시 나와 동일한 지각을 했다고 한다면 나의 지각은 최소한 객관성의 첫번째 지표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가 아무 것도 보거나 듣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혹시 그것이 나의 감각적 착각이었을까라고 의심해 볼 것이다. 하지만 감각적 착각은 나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옆에 있던 그가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 그를 지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우리는 다시 한번 자신이 했던 지각의 확실성에 대해  반성해 볼 수 있다. 이 재확인을 거치고 나서도 슈레버에게 있어 그가 했던 지각은 감각적 착각이나 환각이라고 의심할 수 없었다. 그건 그가 저 하늘의 빛을 꿈 속에서가 아니라 깨어있는 상태에서 목격했으며“, 그것도 밤이 아니라 정원에 있던 낮 동안에“, 심지어 며칠 동안이나 계속보았기 때문이다. 한 때 데카르트도 겪은 바 있던, 내가 보고 있다고 믿는 것이 꿈 속의 표상은 아닐까라는 의심을 자신이 깨어있는 상태였다는 자기의식을 통해 떨쳐버린 슈레버에겐 그 지각 체험의 강렬함과 지속성은 그것의 확실성, 나아가 객관성을 의심할 수 없게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단 하나, 정상적인 경우라면 분명히 목격했음에 틀림없는이 하늘의 빛에 대해 아무런 놀라움도 표현하지 않는 간병인 M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슈레버는 이미 전부터도 간병인 M이 잠시 기적을 통해 살아있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영혼이라고 의심 할 만한 많은 사례들을 접해왔었고, 이제 이 하늘의 빛 사건은 슈레버의 이런 믿음을 더 확증시켜 주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슈레버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다.



나는 당시의 그가 실제 인간이 아니라 다만 일시적으로 응결된 인간이었다고 가정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간병인 M도 분명히 목격했음에 틀림없는, 거의 하늘의  6할에서 8할을 차지하는 그 빛에 의해 크게 눈이 부셨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놀라움을 표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장에서:

 

당시 나는 M 그를 감지하지 못한 것에 대해 별로 놀라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그가 다만 속의 Traumleben 살고있는, 따라서 사고하는 인간에게는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킬 밖에 없는 인상들에 대해 이해할 없는 일시적으로 응결된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극히 논리적 판단 과정을 거쳐 도달한 슈레버의 결론이 우리 정상인들의 판단과 어딘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슈레버에게서 가능한 세계의 범위가 우리의 것보다 훨씬 더 넓다는 것 뿐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일상적 판단이 의거하고 있는 가능세계에선 기적을 통해 사람의 모습으로 일시적으로 응결된 영혼 따위의 가능성이 제외되어 있는데 반해, 슈레버의 세계에선 소위 사실성이라는 논리에 의해 마련된 이러한 제한들이 없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을 빌어 이야기하자면 슈레버는 우리 정상인들의 일상적인 생활이 따르고 있는 언어 게임의 규칙과는 다른, 그보다 훨씬 유연하고도 넓은 가능성을 제공하는 규칙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슈레버는 그의 강렬하고 의심할 바 없는 체험에 근거해 당시 그가 머물던 라이프찌히 정신병원이 지구가 아닌 다른 천체에 홀로 떨어져 있고(원래 병원 옆에 있어야 할 기차역에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피아노를 칠 때마다 영혼들이 그를 방해하고 있으며 (망치로 건반을 내려쳐도 끊어질리 없는 쇠로된 피아노 줄이 여러 번 끊겼기 때문에), 몇 밀리미터 크기의 작은 남자들이 그의 눈꺼풀을 임의로 끌어내리고 있다(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지어 다른 사람들과 대화 중에도 눈이 감기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슈레버의 이러한 판단들은 우리가 그에게 어떤 다른 증거혹은 경험들을 지시함으로써 금방 교정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그의 가능세계 속에서 그의 지각과 지각에 의해 지탱되는 판단 혹은 믿음들이 서로 하나의 체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들의 체계 -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지식의 덩어리 ­Wissenskörper“라고 부른다 - 구조상 동일하다.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믿음을 지지해주는 다른 믿음들에 의해 지탱된다. 믿음을 지탱해주는 다른 지식 혹은 지식에 대한 믿음이 많으면 많을수록, 또한 믿음을 의심케 하는 근거가 적으면 적을수록 믿음에 대한 나의 확신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것이 과학적 사실이건, 종교적 혹은 음모 이론적 믿음이건, 아니면 남편 혹은 아내의 부정에 대한 의심이건 모든 의심 혹은 믿음의 구조는 특정한 믿음(혹은 의심) 믿음(혹은 의심) 지탱해주는 다른 믿음(혹은 의심) 체계들로 이루어져 있다. 남편 혹은 아내의 부정에 대한 의심은 그를통해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사소한 대상, 사건, 소문 등을 우리의 의심을 확증해주는 근거이자 증거로 해석하게 한다. 그러한 근거와 자료, 흔적과 소문, 자취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우리의 의심은 점점 강화될 것이며, 모든 근거들에 의해 강화되고 지탱된 우리의 의심은 좀처럼 사라지기 힘들 것이다. 이제 최초의 의심과 지각이 서로 서로를 강화하고 지탱해 주는 악마적 순환관계 Teufelskreis 생겨난 것이다.




슈레버가 <주목할 만한 정신병자의 기록>에서 진지하게 묘사하고 있는 그의 우주론적 망상체제는 이러한 점에서 외부를 향해 있는 창문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그는 책의 후기에서 이전에 자신이 내렸던 결론들이 감각적 착각이나 환각에 의거한 것일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하지만, 동안의 체험을 통해 구축해 놓았던 그의 우주론적 믿음은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을 편집증 환자라고, 그의 믿음을 병적 환상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옹호하고 설득시키려는  거기엔 금치산 판정에 불복하는 법정 소송을 위해 그가 작성한 소송문 (우리는 슈레버가 판사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포함된다. 그리고 그는 재판에서 이긴다!  - 슈레버의 시도는, 픽션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편의 진귀한 드라마를 제공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