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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레버 메모 : 축복. 기억과 망각의 행복한 조화

김남시 2008. 11. 16. 08:43

 

보통 축복이라고 번역되는 „Seligkeit“ 슈레버에겐 하늘 나라 신의 곁에 존재하면서 정화된 영혼이 도달하게 되는 일종의 세계 혹은 공간이기도 하고, 인간이 지상에서 사는 동안 윤리적으로 선한 행동을 함으로써 쌓게되는 ansammeln – 마치 카드 사용 실적에 따라 늘어나는 포인트 점수처럼! – 무형의 재산이기도 하며, 그를통해 누군가가 공간에 받아들여질 만큼 충분히 selig 하다고 판정받게 되는 등급이자, 등급을 받게 선한, 정화된 영혼이 처하게 되는 어떤 상태Zustand이기도 하다.

 

슈레버에 따르면 축복을 받게 영혼은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하는 인간과는 달리 영원히아무 노동도 필요없이 다만 끊임없는 향유의 상태 자신을 맡기고 있다.   여기서 슈레버가 말하는 영혼이 감지하는 향유 성격이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육체가 없는 영혼은 어떻게, 무엇(?) 가지고, 무엇(!) 향유하는 것일까! 육체없는 향유. 육체가 없기에, 육체에 의존되어 있지 않기에 그만큼 무한히 지속되고, 한계없이 강렬한 향유 

 

축복 상태에 있는 영혼이 처해있다는 이러한 향유에 덧붙여 영혼에게는 다른 적지않은 즐거움이 보장되어 있다. 그건  지속되는 향유에 자신을 내어 맡기면서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데서 나오는 즐거움이다. 슈레버에 의하면 축복 상태의 영혼은 자신이 인간이었던 과거 시절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그를 회상하면서 살아간다. 아무 일도 하지않는 무위의 편안함 속에서, 끊임없는 향유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영혼은 이를통해 무엇과도 비교할 없는 행복감 누린다는 것이다.  

 

과거, 특히 자신이 겪었던 사랑의 설레임, 작은 성공, 즐거웠던 삶의 사건들을 기억하고 회상하는 일은, 그럴 조건과 환경만 마련된다면, 인간에게도 작은 행복감을 준다. 즐거웠던 과거 뿐만 아니라, 예를들어 고통스럽던 체험도 그에대한 기억, 회상 속에선 그것의 직접성을 상실하고 하나의 그림이 된다. 그래서 우린 예를들어 나무에서 떨어져 팔을 부러뜨렸던 끔찍한 체험을, 그때의 (육체적) 고통을 다시 느끼지 않으면서도 기억 있다. 물론 우리에게는 그렇다 하더라도 결코 회상하고 기억하고 싶지않은 그런 과거들도 있다.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니 바램과는 달리 그것이 떠올려지는 만으로도 소리를 지르고 싶을만큼 괴롭고, 고통스럽고, 창피스러운 과거가.

 

하지만 영혼들에겐 이런 과거조차 그만큼 고통스럽지 않게 회상하고 기억할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있다. 그건 영혼이, 살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스럽고, 창피한 과거가 우릴 괴롭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현실원칙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굳건히 움켜지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시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에게, 그가 저지른 과거의 실수, 잘못된 판단과 결정들은 그의 날을 가로막는, 그래서 대개의 경우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억압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자신의 과거를 변명하고, 숨기고, 억압하면서 구차하게 .... 의무로부터 방면된 영혼들은, 이미 자체로 과거가 현재의 (영혼으로서의 !) 드리우고 있는 깊은 그림자로부터 자유롭다. 과거의 삶에 의존되어 있지 않는, 불쑥 불쑥 예기치않게 회귀해오는 과거로부터 공격받을 현재의 삶을 가지고 있지 않은 영혼들은 그래서, 인간시절 자신의 과거를, 우리가 자신의 전생에 대해 이야기하듯, 떠올릴 있는 것이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우릴 숨막히게 하는 행복한 회상과 영원한 향유 속에서 살아가는 축복상태의 영혼에게 슈레버는 하나의, 사실상 모든 가능케 하는 결정적 능력을 부여하는 잊지 않는다. 그건 망각이다. 슈레버에 의하면 영혼들은 신의 광선 슈레버에게 이는 인간 신경과 동일한 성격과 구조를 갖는 신의 신경이다 매개로 아직 지구에 살고있는 그들의 가족, 친지, 친구들의 근황을 파악할 있다.  (때로 영혼들은 자신의 지인들이 죽고 나서 자기가 있는 축복계로 끌어 올려지도록 힘을 수도있다. – 말하자면 천상 세계에서도 연줄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정당한 질문이 제기될 있다. 만일 아직 지상에서 살고있는 가족이나 친지 누군가가 불행한 처치에 놓이게 된다면 그를 보고있는 영혼들도 그에따라 불행해지지 않을까? 지상에 살고있는 지인들의 불행이 끊임없는 향유 속에서, 과거에 대해 회상하며 살아가는 천상에서의 영혼들의 행복을 훼손시키지 않을까? 질문에 대해 슈레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지구에 살고있는 가족들이 불행한 처지에 놓여있다는 알게되면 영혼의 행복감이 흐려질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과거 인간시절의 기억은 가지고 있을 있지만 영혼으로써 자신이 느끼는 새로운 인상들은 그만큼 오래 보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혼의 자연적 망각 natürliche Vergesslichkeit 통해 영혼에게 달갑지 않은 새로운 인상들은 곧바로 사라져 버린다.“

 

여기서 니체의 숨결을 느끼지 않을 있을까? 이전의 철학자들이 망각을, 모든 파악하고be-greifen, 장악해 er-greifen 개념 Begriff 으로써 자신 속에 보전하고 있어야 정신의 능력이 허약해지고, 결핍됨으로써 생겨나는, 그래서 이상 자신이 것을, 자신이 읽은 것을, 자신이 이해하고 깨달은 것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지 못하는 어떤 무능력 vis inertiae 으로 이해했던 반해, 처음으로 망각을, 아무 것도 잊어버릴 없어 벌벌떠는 정신의 불안함과 일어난 과거의 일들을 수백번, 수천번 아니 영원히 반복해도 좋다고 긍정하지 못하는 정신의 소심함을 극복할 있게 해주는 능동적 힘이라고, 그래서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쾌활함도, 희망도, 자랑스러움도, 현재도 존재할 없다inwiefern es kein Glück, keine Heiterkeit, keine Hoffnung, keinen Stolz, keine Gegenwart geben könnte ohne Vergeßlichkeit“ ( Zur Genealogie der Moral) 이야기했던 니체를.

 

슈레버가 니체를 읽었었는지 우리는 없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유일한 <주목할만한 신경병 환자의 기록 Denkwürdigkeiten eines Nervenkranken>(1903)에도 칸트의 이름은 등장하지만 니체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부르조아 계급이 갖추어야 모든 교양과 지식을 갖추고 있던, 피아노를 능숙하게 연주하고, 모국어인 독일어는 물론 영어, 이태리어, 불어, 희랍어를 읽을 있으며, 자신에게 말을 걸고, 질문을 퍼부어 그의 정신을 장악하려던 내부 목소리들에 대항해 괴테와 쉴러의 발라드, 바그너의 오페라를 암송할 있던 슈레버가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니체가 사망한 1900 슈레버는 두번째 발병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니체의 책을 한번쯤은 손에 들었을 것이라는 , 그를통해 그것이 슈레버의 광대한 우주론적 망상체제를 수립하는데 했을 것이라는건 개연적이다.   

               

어쨋든 슈레버가 말하는 축복은, 자신에게 달갑지 않은 새로운 인상들은 자연적 망각을 통해 잊어 버리고, 달콤한 기억과 회상의 기쁨을 가져다 주는 과거 인간 시절의 기억들만 보존하는 기억과 망각 사이의 절묘한 조화 속에 존재한다. 자신의 <기록> 집필하고 있던 슈레버는 스스로 이러한 축복속에 처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