귄터 안더스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이런 기술적, 프로메테우스적 능력과 그에 걸맞게 우리가 발전시키지 못한 표상과 감정 능력 사이의 이러한 부조응와 편차가 오늘날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묵시론 불감증Apokalypse-Blindheit“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말한다. 우리 스스로가 생산해 낸 것들로 인해 현실적으로는 세계의 묵시론적 파국의 가능성이 점점 증가해 가고 있건만, 정작 우리의 표상과 감정은 그 파국을 감지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핵 전쟁으로 인한 인류의 몰락은 말할 것도 없이, 환경파괴와 지구 온난화가 가져다 줄 파국, 세계화된 금융 자본의 몰락으로 인해 생겨날 묵시론적 재난 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근대 이전 중세인들이 세기 말에 대해 느꼈던 공포의 십분의 일 만큼도 심각하고 진지하게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의 크기 Quantum에 상응하는 크기의 불안“[2] 을 갖지 못하게 하는 이러한 묵시론 불감증은 그를통해 우릴 위협하는 재앙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을 막는다. 세계의 묵시론적 파국을 경고하는 여러 목소리들에 한편으로는 우려의 표정을 짓는 동안에도, 우리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뿌리 깊은 역사 발전에 대한 확신[3]은, 인류가 지금까지 모든 위기를 극복해왔듯 이 모든 문제들도 결국 스스로 해결될 것이며 우린 다시 그 모든 걸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속삭인다.
이는 미래를 밝은 측면으로만 바라보려는 긍정적 낙관주의의 소산일까? 그렇지 않다. 귄터 안더스에 의하면 오히려 이는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니힐리즘적 멘탈리티와 관련되어 있다. 그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나와는 도덕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우리의 삶의 조건에서 나온다. 곧, 우리가 더 이상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주도하고 이끄는 능동적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 작동하고, 생산하고, 소비하며, 파괴하면서 굴러가고 있는 이 세계 기계의 ‚능동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은 매개적 mediale’ 존재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에서. 한 공장의 노동자로서, 한 기업의 사원으로서 우리는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과에 대해 의식하고 그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지는 도덕적 주체로 ‚행동 Handlung’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개 직원으로서 주어진 업무를,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그것이 어떤 식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에 영향을 끼치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수행하고 처리하는 ‚노동 Arbeit’을 행하고 있을 뿐이다. 자기가 속한 회사가, 자신이 거기서 일하는 공장이 오늘날의 글로벌한 네트워크를 통해 세계 저 편에서 어떤 일들을 벌이고 있는지 우린 알지 못하며 또 별 관심도 없다. 그 기업이 어떤 사회적 기여를 했다고 내가 자랑스러워하지 않듯, 그 기업이 사회적으로 비난 받을만한 행위 – 열악학 노동조건, 아동노동, 환경파괴 - 를 했더라도 그건 일개 직원인 내가 도덕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이 아니다. 멜라민 분유가 갖는 도덕적, 사회적 책임을 컨베이어 벨트에서 분유통을 포장했던 노동자에게 물을 수 없는 것도,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장기적으로 힘겹게 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게도 만든 금융위기의 사회적, 도덕적 책임을 월 스트리트에서 증권을 팔던 직원에게 물을 수 없는 것도, 자신의 노동을 통해 생산해 낸 것의 도덕적 지위를 그를 생산하는데 참여한 사람의 도덕적 지위와는 관계없는[4] 것으로 여기게 하는 오늘날의 소외된 삶의 조건에서 기인한다.
묵시론적 재난의 가능성을 자신의 문제로 느끼지 못하는 우리의 표상적 무능력은, 자신이 단지 한 매개적 부속품으로만 참여하고 있는, „저 바깥“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무관심/무책임과 결합해 우리 눈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파국적 재난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매일 매일 우리에게 주어진 노동을 수행하면서 세계의 묵시론적 파국을 실질적으로 앞당기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표상과 감정 능력을 넘어서 있는 글로벌한 재난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또 우리의 책임도 아닌, 그러나 언젠가는 스스로 해결될 것이라 기대되는 어떤 ‚유령이나 가상 Phantom’과 같은 사건들이라고 여긴다. 안더스는 라디오와 티브이를 통해 우리에게 ‚배달되어 오는’ 세계가 이미 그를통해 이러한 ‚가상’과 ‚매트릭스’로 변모되었다고 말한다. 노동하는 주체로서 우리가 스스로 굴러가고 있는 이 세계의 법칙에 순응하듯, 미디어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이 세계도 외부 세계 객관성의 가장 큰 특징인 ‚저항 Widerstand’의 성격을 상실하고는 우리 몸에 딱 들어맞는 옷처럼 우리에게 순응[5]해온다. 편안하게 그 세계를 소비/소모하는 가운데 상실되어 가는, 우리에게 맞서고, 충돌하며, 우리에게 저항하는 세계와 직접 맞닥뜨릴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저 재난들이 단지 유령이나 가상이 아니라 커다란 몸집으로 우릴 위협하는 객관적 실제로 등장하게 되었을 때 뼈저리게 필요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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