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 있는 세계

번역에 대한 단상

김남시 2008. 9. 26. 04:54

 

아래는 최인훈의 <광장>에 나오는 대목이다. 

 

번들거리는 빠름이 먼지를 날리며 튄다. 색안경 너머 바닷속 같이 가라앉아 보이는 들괴 뫼들이, 획 달려오는가 하면 금시 뒤로 빠진다. 경인 한길을 명준은 모터 사이클에 몸을 싣고 달리고 있다.  빠르게 달리는 틀에 앉아 있는 몸에는, 한창 찌는 듯한, 칠월달 한낮 지난 공기도 선풍기 쐬는 속이다. 지난해 겨울, 영미와 같이 와보고 지금 두 번째, 윤애네를 찾아가는 길이다. „

 

내가 이 오래된 소설의 문장에 다시 주목하게 된 것은, 독일에서 비교 문학을 전공하고 현재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Gitte 가 자기 블로그 Seoul Mate 에서 이 대목의 독일어 번역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기 때문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위 첫문장이다.

 

번들거리는 빠름이 먼지를 날리며 튄다.“

 

거의 10년도 더 전에 <광장>을 읽었던 나는 거기에 이런 문장이 등장하고 있었다는 걸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최인훈은 이 수수께끼 같은 문장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2001년 독일어로 출간된 <광장 Der Platz>에는 해당 문장이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Mit ziemlicher Geschwindigkeit schnurrte die Maschine dahin und zog eine Staubfahne hinter sich her."

 

이 문장을 다시 한국어로 대강 번역해 보자면 상당한 속도로 기계(오토바이)가 그르렁거리면서(그르렁거리며 지나가면서) 그 뒤로 먼지 깃발을 끌었다정도가 될 것이다. Gitte가 블로그에서 지적하고 있듯 이 독일어 번역은 그러나, 그렇게 잘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분석에 따르면, „ziemlicher Geschwindigkeit“는 일상 회화에서라면 몰라도 글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표현이며, 고양이 등이 기분 좋을 때 내는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묘사하는 „schnurren“ 이라는 동사를 기계 혹은 오토바이가 달리면서 내는 소리를 묘사하는 데 사용한 것도 어색하고, 나아가 여기 사용된 먼지깃발Staubfahne“ 이라는 표현은 차나 오토바이 등이 지나가면서 일으켜 내는 먼지를 지칭하는 „Staubwolke“ (먼지구름)와 무엇인가 불타는 것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지칭하는 „Rauchfahne“ (연기깃발)이란 두 단어를 섣불리 혼종 교배시켜 만들어 낸 것이다.

 

주로 한국인/독일인의 공동 작업을 통해 이루어지는 한국문학의 독일어 번역이 전반적으로 그렇게 훌륭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은 그를 읽어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지적하는 바이다. 그건 무엇보다 한국 번역가가 해당 문학 작품의 문장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기인할 수 있다.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해서 그는 그 의미와는 동떨어진 독일어 표현을 번역어로 선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한국어 문장을 깊이있게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에게 독일어 표현 능력이 부족하다면 그 역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때문에 한국어 번역가는 독일어를 모국어로 하는 원어민 번역자와 공동 작업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는다. 한국 번역가와 독일 번역가가 한국어 문장의 번역을 둘러싸고 함께 토의할 때 사용하는 언어가 또한 이 공동 작업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잘하더라도 독일어를 잘하지 못하면 한국 번역가는 자신이 이해한 바를 독일 번역가에게 제대로 전달해 내지 못할 것이다. 독일어를 모국어로 하지만 한국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독일 번역가는 원래의 한국어 문장에 걸맞을 만한 독일어 문장을 만들어 내는데 실패할 것이다. 거꾸로 한국 번역가가 오랜 독일 생활 등을 통해 능숙하게 독일어를 구사한다 하더라도, 대개의 경우 그와 비례해 뒤떨어지게 마련인 그의 한국어에 대한 감은 한국 문학, 특히 동시대 문학작품을 이해하는데 장애를 초래할 것이며, 이는 독일 번역가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국어와 독일어 이 두 언어에 모국어처럼 익숙해 있어서 이 번거롭고 위험 부담이 큰 두 언어 사이의 대화를 혼자서 행할 수 있는 번역가가 있다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그러나, 한 언어에 대한 이해가 그 언어로 이루어지는 삶에 대한 이해를 필연적으로 전제하며, 그것은 그 언어로 이루어지는 삶을 직접 살아보아야만, 구체적으로 말해, 그 언어로 대화하고, 읽고 쓰면서 그 언어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삶에 참여함으로써만 가장 잘 얻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참으로 힘든 기대일 것이다. 그런 번역가는 서로 다른 언어로 이루어지는 삶을 동시에살아갈 수 있는 사회, 문화적, 나아가 경제적 조건이 갖추어진 곳에서만 생겨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언어라 할지라도 그것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한국어를 잘하는 적지 않은 독일 번역가들에게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건 그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한국어를 배웠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예를들어 현재 박경리의 <토지>를 한국인 번역자와 공동으로 번역하고 있는 헬가 피히트 씨는 구 동독 시절 동독과 수교를 맺고 있던 북한에서, 북한 사람들을 통해 한국어를 배운 인물이다. 그녀의 이러한 한국어 경력은 박경리의 <토지>를 번역하는 데는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예를들어 그녀가 배수아, 김영하, 정이현 등의 작품을 번역하려 한다면 큰 장애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다시 위 최인훈의 문장과 그에 대한 독일어 번역에로 돌아가 보자.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원래의 한국어 문장 번들거리는 빠름이 먼지를 날리며 튄다와 그것의 독일어 번역 „Mit ziemlicher Geschwindigkeit schnurrte die Maschine dahin und zog eine Staubfahne hinter sich her"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을 번역에 대한 일반적인 문제다.

 

독일어 번역자는 무척이나 시적이고 은유적으로 쓰여진 최인훈의 이 문장을 원래 그 문장에는 담겨있지 않은 정보들을 함축하고 있는 문장으로 번역해 내었다. „번들거리는 빠름이 먼지를 날리며 튄다라는 문장을 읽는 사람은 이것이 주인공 명준이 뜨거운 한 여름 오토바이를 타고 경인 한길을 달리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는 걸 아직 알지 못한다. 이 정보는 그 이후의 문장들에서 비로소 제공된다. 나중에야 비로소 얻어지는 이 정보를 그 이전의 문장에로 투사해서 읽고 있는 독일어 번역자는 이러한 역행적 번역을 통해 원래 문장이 가지고 있는 것 이상의 것을 독자들에게 누설하고 있다. 이는 이 수수께끼 같은 문장을 통해 어쩌면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려 했던 작가에 대한 배반이자 배신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나쁜, 심지어 잘못된 번역이라고 말해야 할까?

 

    번역을 하는 번역자가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 고민들 중 하나는 그가 언어의 어떤 층위에 자신을 위치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번역해야 할 대상 언어의 언어 자체 Wörtlichkeit’에 자신을 굳게 한정시키고는 독자들이 자신의 번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원래 대상 언어의 탓으로 돌릴 것인지, 아니면 작가를 배반하거나 배신하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독자들에게 대상 언어 자체에 담겨있는 것 이상의 정보를 누설함으로써 텍스트의 이해 가능성을 높이는 길을 택할 것인지. 많은 경우 우리는 이 두 방향 가운데 어디쯤에선가 타협점을 찾을 수 밖에 없다. 물론 그 타협의 지점도 그것이 어떤 종류의 텍스트인지, 혹은 동일한 텍스트 내에서도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부분인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