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쯔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을 읽었다. 폭력에 대하여 라는 제목을 단 1장에서 부터 파농은 식민지 지배자들과 피식민자들 사이의 관계가 화해할 수 없는, 평화적으로 협상될 수 없는, 타협되지 못하는 antagonistisch 관계라고 천명한다. 식민지 지배체제 청산 Dekoloniaisation은 세계의 질서를 바꾸는 일이며, 절대적인 변혁의 프로그램이다. 그것은 결\코 어떤 평화적 협정이나, 마술적인 해결로 이루어질 수 없다. 거기엔 필연적으로 폭력적 대결이, 식민지 체제가 유지되기 위해 이미 일상적으로, 구조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폭력을 절단시키는 폭력적 대립이 요구된다. „피식민자들이 식민지 세계를 문제시한다는 것은 어떤 관점들의 합리적인 대립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보편적인 것에 대한 논문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정립되어 있는 자신만을 야만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Frantz Fanon. Die
Verdammten dieser Erde, Shurkamp 1967, S.31) 파농에게는 이러한 절대적 대립에 맞서있는 존재들,자신의 땅에 식민지 지배자와 피식민자의 두개로 구분된 세계를 만들어내고, 피식민자들이 접근할 수 없던 그 쪽에서 살고있던 백인이자 외국인, 그 식민지 지배자들은 이런 의미에서의 „타자“ (S.31)에 다름 아니었다. 오늘날의 세계가 파농이 이 책을 썼던 1960년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왔는지, 그사이 얼마나 많은 것들이 변화했는지를 알기 위해선 단지 다음의 질문만을 던져보면 된다. 파농이 이야기하던 이 ‚타자’들은, 또 이들을 ‚타자’라고 지칭하던 이들은 오늘날 어디에 있는가? 백인 식민지 지배자들을 ‚타자’라고 부르며 그들과의 폭력을 불사한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 대립을 이야기하던 그 주체들은 오늘날엔, 몇 년 동안 모은 돈을 브로커 비용으로 지불하면서. 정원이 훨씬 초과된 쪽 배에 목숨을 걸고 스페인 해안으로, 이탈리아의 섬으로, 유럽 연합의 국경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는 난민들이 되었다. 그와 더불어 오늘날 ‚타자’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국경으로, 난민 수용소로, 자신들의 노동 시장으로 몰려드는 이들 과거 피식민지 자들을 바라보는 과거 식민지 지배자들의 후손유럽의 백인들이다. 파농에게선 타협할 수 없는 폭력적 대결을 통해서 극복하고 해소시켜야 했던 자신과 타자의 관계는, 오늘날 레비나스에게서, 데리다에게서, 또 타자를 이야기하는 많은 유럽 지식인들에 의해선 해소될 수 없는, 아니 해소되어서는 안되는 자신 속의 '이질적인 것'으로 동일화의 폭력으로부터 우릴 견제해주는 하나의 윤리적 요청이 되었다.
'읽을수 있는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슈레버 메모2. 지각과 믿음. (0) | 2008.12.02 |
---|---|
귄터 안더스 : 어제의 사랑 Lieben gestern. 느낌의 역사를 위한 메모들 (0) | 2008.11.26 |
슈레버 메모 : 축복. 기억과 망각의 행복한 조화 (0) | 2008.11.16 |
묵시론적 재난에 대한 불감증 : 귄터 안더스 <인간의 구식성> : (0) | 2008.10.30 |
번역에 대한 단상 (0) | 2008.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