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문자, 미디어

통역의 언어학

김남시 2004. 10. 11. 22:08

아르바이트 통역을 할때 나는 독일어를 듣고 그걸 한국어로 옮기고, 한국어를 듣고 그걸 다시 독일어로 옮긴다. 나에게 한국어를, 그리고 독일어를 듣는 사람들은 통역자인 내가 두 서로 다른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투명한 필터이기를 원한다. 한국어로 말하는 이는 자신의 말이 나라고 하는 필터를 통과해 그대로 마주 서있는 독일인에게 전달되기를 원한다. 독일어로 그에 답하는 이는 나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입장과 태도가 그대로 질문한 한국인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

통역을 하는 나는 그러나, 이러한 바램이, 데리다가 지적하듯, 인류의 오랜 형이상학적 욕구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걸 안다. 말을 통해 상대방과 의사소통 하는 이는 자신의 말이,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에게 울릴때 느껴지는'자명함과 투명함'의 수준만큼 상대방에게 전달되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신이 말한 „그것“이 그 말을 할 때 자신의 눈 앞에 떠올리는 저 자명한 바로 '그것'이라는 의미로 상대방이 이해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소통 매체인 말을 듣는 사람에게 그 말은 유감스럽게도, 말을 하는 사람이 그 말을 하는 순간 느끼는 만큼 자명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랑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그 말을 하는 순간 자신의 가슴 속에 가지고 있는 저 자명하고도 애절한 설레임은 그 말과 더불어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 말은 자신의 저 자명한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히려 상대방의 화를 불러 일으킬 수도, 돌이키지 못할 오해를 낳을 수도,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겐 그토록 자명했던 말에대한 처절한 배신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우린 말이 말하는 사람을 처절하게 배신하고, 더 이상 말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비관주의로 빠져들게 하는 경우를 종종 마주친다.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투명하고 중립적인 '영혼의 울림'이 결코 아니다.

 상대방과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우리는 상대가 단지 내 말의 '정보'를 접수하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통해 그에게 원하고자 하는 나의 '요구'까지 전달되기를 원한다. "목이 마른데"라는 말은 내가 목이 마르다는 '정보' 를 통해 상대가 내게 물 한잔을 갖다주기를 바라는 나의 '요구'를 표현하고 있는 거다. 통역에게 '하나의 문장을 그에 사전적으로 정확하게 대응하는 다른 문장으로 변환시키는 소위 객관성'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그를통해 대개의 경우 실질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목표에 실패하기 쉽다. 독일어 혹은 한국어가 다른 언어로 문자 그대로만 변환되었을 때 그 말 속에 함축된 요구가 그대로 함께 표현될 수 있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통역은 독일어 혹은 한국어 문장의 문자 그대로의번역이 아니라, 그 말이 독일어 혹은 한국어의 구체적인 대화 상황 속에서 가질 수 있는 화용론적 의미까지 고려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 통역자는 각각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 장에 대한 이해, 다시말해 그 언어공간 속에서 특정한 말이 가질 수 있는 문화적 함축들을 이해하고 있어야만 한다.  

나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독일인과 한국인은 그리하여 이중의 배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은 '말'이라는 매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배반의 가능성과 구조와 어휘와 그 속에 담긴 세계관이 서로 다른 두 언어를 상대방의 언어로 '변환 trans-late'하는 역할을 하는 통역의 배반 가능성이다. 저 투명하지 못한 매체 '말'이 그 말을 사용한 사람의 의도와는 어긋나는 '이미지와 감정, 생각'을 상대방에게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들을 배신한다면,하나의 언어를 그와는 전혀 다른 구조를 갖고있는 다른 언어로 전환해야 하는 통역은 그 두 다른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문화적 심연을 뛰어넘지 못해 그 대화자들을 배반할 수 있다.

이 배반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통역에게 양날이 달린 칼로 피를 흘리지 않고 살 덩어리를 떼어내어야 하는 샤일록이 되길 요구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받게되는 살덩이는 그러나, 죽어 쓸모없는 고깃덩어리이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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