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문자, 미디어

언어의 통약가능성에 대한 한 일화

김남시 2005. 4. 2. 05:28

버스라는 단어는 우리에겐 다만 모터를 달고 시내를 질주하거나 먼지나는 시골길을 누비는 자동차-버스만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유럽인들에게 버스라는 단어는 모터가 달린 자동차-버스가 등장하기 이전의 많은 유형의 버스들을 함께 상기시킬 것이다. -버스, 증기-버스, 옴니-버스 등. 구지 비트겐스타인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하나의 단어의 의미, 나아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연상과 표상들이 항상 그 단어의 구체적인 사용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있다. 

버스라는 단어를 말과 증기기관에 의해 구동되는 대중 교통수단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해왔던 유럽인들에게 이 단어는 우리가 알고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대상을 지칭하며, 그 단어가 우리에게 떠올리는 것 보다 풍부한 기억연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역으로 유럽인들에게 쓰시라는 단어가 연상시키고 불러내는 표상들은 우리들의 그것에 비하면 형편없이 초라하고 빈곤할 것이다. 그들에게 그 단어는 기껏해야 냉동 참치나 신선하지 않은 생선살에 밥알과 김 조각이 붙은 비싼 음식만을 떠올리게 할 것이지만, 우리에게 그 단어는 저 수많은 생선의 종류에 따라 서로 다른 질감과 색깔, 나아가 그에 딸려나오는 많은 종류의 쯔게다시등을 풍부하게 떠올리게 한다.

말과 단어들이 불러내는 표상들이, 나아가 그것의 의미가 이처럼 그것의 사용에,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들이 지칭하는 대상들에 대한 경험에 의존되어 있다는 이러한 감각주의적sensualistisch 언어관은 철학사적으로는 그전까지의 본질주의적 언어관으로부터의 결별로부터 시작되었다. 모든 단어와 이름들이, 그것의 사용과는 무관하게 그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는, 소위 아담의 언어 Lingua Adamica“에 대한 표상으로 부터 생겨난 저 관념론적 사고방식은 17세기 록크와 이후 콩디악의 언어철학을 통해 근본적으로 무너지게 되었고[1], 비트겐스타인은 이러한 사유를 현대 언어철학의 근본 사고로까지 확립시켰다. 

그러나, 말과 단어들이 그것의 사용과 그와 결부된 경험들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와 표상들과 결합된다고 한다면, 이전 본질주의적 언어관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언어의 번역 가능성이 새로운 문제로 제기되게 된다. ‚버스쓰시가 유럽인들과 한국인들에게서 서로 다른 표상과 의미를 불러 일으킨다면 우린 어떻게 서로 다른 언어공동체, 곧 서로 다른 문화권 사이에서 통약 가능한언어를 찾아낼 수 있겠는가.

16세기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예수회 신부Francis Xavier 는 신을 지칭하는 라틴어 단어 DEUS가 동 아시아의 일본인들에게도 동일한 신에 대한 개념을 전달해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러한 언어 특히 기독교 신의 이름 - 의 통약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이미 15세기 말부터 시작된 비 유럽지역 카톨릭 선교활동의 기본토대[2] 이기도 했다. 저 먼 이국의 땅, 일본에 하느님의 가르침을 전파한다는 종교적 사명에 가득차 자비어는 다른 예수회 선교사들과 함께 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일본인들에게 „’ダイウスをしんじませ!“, „다이우스를 믿읍시다!“라고 외치며 돌아다녔다. 그러나, 이들의 종교적 확신과 유럽 중심주의에 기초한 본질주의적 언어관은 이들로 하여금 가장 단순한 사실, , 유사한 음성이 서로 다른 언어체계에선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커다란 낭패를 맛보게 했다. Deus의 일본어식 발음이라고 여겼던 ダイウス는 일본인들에겐 큰 거짓말을 의미하는 일본어 단어 大嘘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들이 거리의 일본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1] Hans Aarsleff : The Rise and Decline of Adam and his Ursprache in seventeenth-Century Thoght, in Joachim Gessinger (Hg.) : Theorien vom Ursprung der Sprache, 2 Bande ; Berlin 1989.

[2] Kim, Sangkeun, Strange Names of God : The missionary translation of the divine name and the chinese response to Matteo Ricci’s Shangti in Late Ming China, 1583-1644, Dissertation of Princeton University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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