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문자, 미디어

두 개의 언어, 두개의 세계

김남시 2005. 2. 20. 08:39
수업과 발표, 논문쓰기 등으로 계속 독일어로 말하고 글쓰기에만 매달리다가 간혹 한국어로 글을 쓰려면 난 커다란 내적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 단어는 떠오르지 않고, 문장은 역겨운 약을 집어 삼킬 때처럼 한참을 억지로 쥐어 짜고서야 겨우 튀어나온다. 이러한 증상은 그러나, 번역 등으로 인해 한동안 한국어로 글을 쓰다가 수업시간에 혹은 교수를 만나 독일어로 말을 하거나 글을 써야 할 때도 마찬가지로 생겨난다. 독일어 단어들은 조각 조각 깨어져 맥락없이 뒤섞이고, 문장은 제 자리를 찾지 못해 허공으로 빙빙 헤메 다닌다.

왜, 한국어와 독일어는 내 속에서 이렇게 갈등하는 것일까. 왜 이 두 언어는 내 속에서 항상 투덕거리며 서로 자리 다툼을 벌이는 것일까. 왜 이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결국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기의’를 공유하는 다만 서로 다른 모습의 ‚기표’로 사이좋게 공존하지 못할까. 그건 한국어와 독일어 이 두 언어가 단지 내 머리 속에서 분명하게 현전하는 듯 보이는 말의 ‚의미’를 그저 서로 다른 형태와 형식으로 표현해 내는 ‚외적 표현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사유체계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어로 말할 때, 또 그를 위해 독일어로 생각해야 할 때 생각은 내게 „떠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그 생각에로 다가가 (Ich komme auf die Gedanke) 그를 붙들어야만 (ergreifen)한다. 사유와 글쓰기의 독일어 모드에서는 기억 또한 내게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속의 어딘가 그 기억이 있는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 그를 상기시켜야 (ich erinnere mich an)만 한다. 독일어에서 세상의 모든 것들 – 물건, 생각, 문장 들 - 은 스스로가 자신을 드러내거나 표현하는(sich zeigen, sich aeussern) 행위의 주체로써, 다른 모든 것들을 지시하고, 가리키며, 관계시키는 주어로 등장한다. 하나의 사태는 다른 의미를, 하나의 사건은 다른 맥락을, 하나의 주장은 그것에 함축되어 있을 다른 배경 사상을 지시하고(hinweisen), 드러내고 (zeigen), 관계맺게(beziehen)한다.

독일어는 그를 누가 (Subjekt) 수행하느냐에 따라 항상 다른 형태로 변화되어 표현되는 모든 행위들이, 그 모든 인칭과 격과 단수 혹은 복수의 다양한 조건들을 초월해 그 행위 자체를 표현하는 ‚원형’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누가 그 행위의 주체인지에 따라, 곧 나 (denke) 혹은 너 (denkst), 그 (denkt), 너희들 (denkt), 아니면 우리 (denken) 냐에 따라 그 형태는 수시로 변화하지만, 저 ‚생각한다 Denken’는 행위 자체의 이념은 그 모든 변화들의 ‚원형’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독일어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속성 (Akzidenz)들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지만 그 본질에 있어선 변화하지 않는 실체(Substanz)를 생각하게 한다.

나아가 독일어의 세계 속에서 사물들은 한국어에서와는 다른 질서와 범주로 이루어져 있다. 장갑과 신발, 바지와 팬티, 책상과 식탁 등 한국어의 세계 속에선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물건들이 독일어에선 동일한 카테고리로 묶인다. 개와 물개, 소와 코뿔소, 말과 얼룩말, 쥐와 다람쥐 등 한국어에선 같은 범주에 속하는 동물들이 독일어에선 서로 다른 종류인 것으로 분류된다. 독일어에서 ‚경험’은 우표나 동전을 모으듯 „수집sammeln“되고, 결정은 화살이나 돌멩이로 과녁을 맞추든 „겨냥 treffen“되며, ‚시간’은 흐르지 않고 „달리고laufen“, 배가, 머리가, 이빨이 아픈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아프게“ 하며 es tut mir weh, 내가 진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진정시켜야’ ich beruhige mich 한다.


말하자면, 독일어로 말하거나 글을 쓰기위해 나는 한국어가 내게 열어주는 사물들과 그 사물들 사이의 관계, 그것들이 움직이고 생겨나며 이루어지는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 속으로 날 밀어넣어야 하는 것이다. 독일어의 세계의 게임규칙을 익히고, 그 속의 사물들의 질서와 체계에 익숙해지기 위해 필요했던 시간동안 나는 이전에 내게 익숙해 있던 한국어의 그것들로부터 조금씩 낯설어 졌으며 이는 한국어의 물리적 공간을 떠나, 독일어의 공간 속에서 살고 있는 나의 현 삶의 방식으로 인해 더 가속화되었을 터이다. 고양이와 닭, 개와 버스, 발자국과 녹슨 대문이 한국어에서와는 다른 소리를 내는 독일어의 세계 속에서 한국어로 사유하고 글을 쓰기 위해선 내겐 그렇게 낯설어진 한국어의 세계에 다시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한 거다.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행하는 건, 그리하여 내가 알고있는 하나의 세계를 다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에서 그와는 완전히 다른 법칙과 삶의 형식을 지니는 다른 세계로 발을 디디는 것이며, 그를 위해선 늘 일정기간의 적응훈련이 필요하다. 이 두 언어 사이를 어려움없이 왕복하기 위해선 내 속엔 서로 다른 두 세계가 확고하게 세워져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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