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언어는 때로는 그저 중립적인 소통의 매체이지만은 않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관계 속에서 등장했을때 가해자의 언어와 피해자의 언어는 그 언어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문화적 '작용'을 갖는다.
2차 대전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지금도 독일어만 들으면 온 몸이 떨릴 정도의 아득한 섬뜩함을 체험한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독일어는 단지 무엇인가를 소통시키는 중립적 소통매체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삶의 욕구를 위협하는 가해자와 그가 수반하는 공포와 심리적 압박감, 그리하여 증오와 혐오감까지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음성 복합체이다. 일제시대 한국어를 버리고 일본어만을 사용하기를 강요당한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일본어는 그저 한국어와는 다른 음성적 가치를 가진 다른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그 언어를 통해 다가왔었을 위협과 강요, 나아가 그에대한 증오와 환멸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울림이었을 것이다.
독일어를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에게도 2차대전 독일군의 유대인 학살등을 다룬 영화에 등장하는 '독일어'의 울림은 그 자체로 가해자의 등장, 위협, 불안과 공포, 긴장과 긴박감을 일으키는 그 어떤 소리보다 더 효과적인 효과음에 다름 아니다. 우린 우리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독일군 병사의 '말과 음성'을 통해 가해자로서의 독일의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이미지'를 얻게되는 것이다. 반면 그 독일어의 '울림'을 위협과 긴장, 협박과 생존의 갈림길로 받아들이는 피해자들의 언어는 그 말을 우리가 이해하느냐 마느냐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안도와 발각되지 않았던 어떤 소속감, 공동의 위협 앞에서 존재하게 되는 피해자들 사이의 연대와 자기 희생 등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모든 외화를 자막 대신 더빙으로 처리하는 독일 티브이에서 이 영화를 보았던 나는 유감스럽게도 이런 서로 다른 음성적 울림이 낳는 이 장면의 효과를 체험할 수 없었다. 가해자 독일군 병사와는 다른 울림을 가졌어야 할 알베르토 역시 같은 ‚독일어’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명장면은 저 서로 다른 언어의 음성적 울림의 대립의 효과를 잃고 다만 독일 병사의 제스쳐를 응용, 이를 다른 의미의 말로 변화시켜 내는 알베르토의 재치만이 부각되는 평범한 장면이 되어버렸다.
독일군과 연합군이 모두 함께 독일어로 이야기하고(„라이언 일병구하기“), 아우슈비츠의 폴란드 유대인 포로와 독일군 병사가 전부 독일어로 말하는(„쉰들러 리스트“), 심지어 전쟁 중인 일본군과 미군이 모두 독일어로 이야기하는(„펄 하버“) 영화를 떠올려보라. 모든 대사를 독일어로 더빙함으로써 이 영화들은 독일인들에게 이해되기는 하겠지만 서로 다른 언어의 음성적 울림이 주는 극적인 효과를 상실하는, 서투르게 번역된 번안시처럼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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