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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문자와 지배. 평양의 거리 풍경에 대한 문자학적 단상

김남시 2007. 2. 27. 01:19

<파이드로스> (274c – 278b) 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털어놓는 플라톤의 문자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문자는 우리 내부에 존재하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해 주는 기억을 약화시키다. 둘째, 그 속에 말하는 자가 부재하는 문자는 그를 읽는 사람이 그에 대해 질문하고 설명을 요구할 기회를 박탈한다. 세째, 특정한 수취인을 향해 있는 말과는 달리 문자는 그를 읽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무차별적 수취인으로 갖는다. 네째, 말하는 자의 육체적 현존을 전제하는 말이 말하는 자에게 자신의 말에 대한 수행적 책임감을 떠맡게 하는데 반해, 그를 쓴자의 육체적 현존과 분리되어 있는 문자는 그를 자신의 글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면제시킨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세금 정산을 위해 찾아간 관청에서, 이해되지 않는 것을 물어보고, 구체적 사안들에 대해 질문할 담당자 대신 빽빽히 쓰여져 있는 게시판 지침서만 접해보았던 사람이라면 문자에 대한 플라톤의 이런 불만에 크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작 필요로 하는 건 거의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못하는 저 일방적 문자의 무차별적 수취인으로써 우리는 그 문자들이 요구하는 걸 이해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받아 적거나 아니면 모든걸 포기하고 돌아오는 수 밖에 없다.

 

이런 문자의 일방성이 사람들을 지배하게 된다면 그 사회는 어떤 모습을 띄게 될까? 그 곳에서 사람들의 정체성은 그들의 체험과 그에 대한 개인적 기억을 통해 만들어지는 대신 외부적이고 객관화된 기억으로써의 문자가 지시하고 요구하는 것들에 의해 형성될 것이다. 문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문자를 통해 말해지는 명령과 요구들에 대해 질문하거나 반박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다만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요구될 것이다. 특정한 수취인을 지목하는 대신 그를 읽는 모든 사람들을 잠재적 수취인으로 만드는 문자의 무차별성은 그를 읽는 모든 이들에게 바로 자신이 저 문자에 의해 호출되고 있다는 의식을 불러냄으로써 그들을 총체적 지배 구조 속으로 가두어 놓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도심지를 지배하는 것이 화려한 네온싸인으로 번쩍거리는 광고 간판의 문자들이라면 평양의 거리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정치 슬로건들의 붉은색 문자들이다.  자신의 말을 죽음 이후에까지 전달되게 해주는, 그를통해 인간 존재의 필연적 시간성을 극복하게 해주는 문자를 통해 도시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죽은 지도자의 말과 그를 따르라는 명령들이다. 문자를 통해 회귀한 과거의 말들은 이를통해 도시의 현재를 지배하고, 나아가 미래까지를 규정하려고 한다.            

 

문자들은 우리가 장군님을 따라야하는지, 어떻게 이미 죽은 지도자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는지, 우리는 ‚3 혁명 붉은기 쟁취운동을 힘있게 벌여야 하는지라는 질문과 반박에 대답하지 않는다. 앞을 지나는 모든 무차별적 수취인들을 향해있는 문자들은 다만 그것이 말하고 있는 것들이 고스란히 그를 읽는 사람들에게 수용되기를, 그들의 내면에 안착해 기억으로 각인됨으로써 그를 읽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기를, 그리하여 그들이 문자들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 의무감을 짊어지기를 원한다.           



 

 

시민들이 지나다니는 거리와 그들이 일하는 공장을 채우고 있는 문자들은 무엇보다 그것의 편재성으로 인해 로만 야콥슨이 이야기하는 언어의 접속적 Phatische 기능[1] 수행하고 있다. 문자들은 그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봐, 들어!“ 라며 말을 걸고, „당신, 듣고 있나?“ 라고 환기시키면서 문자의 무차별적 수취인들이 문자의 일방적 소통을 향해 항상 채널을 열어 놓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은 말을 걸고 상대의 주의를 촉구하면서도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 문자들을 통해, 문자들 앞에 노출되어 있는 모든 수취인들은 문자들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곳에서의 생활을 포기하도록 강요당한다. 


 

문자들의 이러한 보이지 않는 강제는 여기에 쓰여져 있는 청유형 문장들을 더욱 강화된다. „...준비하자!, 오늘에 살자! ...살아 나가자!“ 라는 청유형 문장들은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말을 듣는 자신을 문장의 행위의 주체 Subjekt 포괄시켜 버린다.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집합적 우리 통합되어버린 자기 자신을 부인하기 위해서 나는, 나와 마찬가지로 집합적 주체 우리속에 포괄되어 버린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 ‚ 아니야!, ‚ 싫어!, ‚ ! – 사회적 고립을 감수해야 한다.

 

말로 이루어지는 청유형 문장이 속에 현존할 밖에 없는 개별적 육체를 통해 그래도 문장의 주체 문장을 말하고 있는 주체 구분할 있게 준다면, 말하는 자가 부재하는 문자화된 청유형 문장에서는 둘은 이상 구별되지 않는다. 이를통해 문자로 쓰여진 청유형 문장들 -„준비하자!... 힘있게 벌이자!,....달성하자!“ – 그렇지 않아도 부재하는 문자 속의 화자를 완전히 은폐시켜버리며, 그를통해 말하는 자와 말을 듣는 자의 집단적 우리에로의 통합은 더욱 완전한 형태를 띈다. 이는 나아가 준비하자!... 힘있게 벌리자!,....달성하자!“ 라는 문자들의 요구에 대한 질문이나 반박을 어렵게 만드는데, 왜냐하면 그에대한 질문이나 반박은 결국 준비하고, 힘있게 벌리고, 달성하는주체로 통합되어 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분열증적 질문이나 반박으로 되돌아 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자들의 일방적 소통 속에선 당신이 하는 말을 이해할 없어요“, „그건 무슨 말이지요?“, „그건 이런 뜻인가요?“라는 물음을 통해 진입하게 되는 메타언어[2] 로의 이행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으며, 이를통해 집합적 우리 통합된 문자들의 무차별적 수취인들은 이제 자기 자신의 말이 되어버린 문자의 자체를 반성적 대상으로 삼는 메타 언어적 능력을 상실한 실어증 Aphasie[3] 환자가 된다. 


 
 

그런데, 평양의 거리에선 이런 집합적 실어증 환자들을 강요된 수취인으로 갖지 않는 문장도 문자화되어 있다. „우리는 행복해요.“ „준비하자!... 힘있게 벌이자!,....달성하자!“ 청유형 문장들과는 달리 문장 속에서의 우리 준비하고, 힘있게 벌이고, 달성하는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행복 느끼고 있는 감성적 주체로 등장한다. 문자화된 문장 - „우리는 행복해요“ - 이 갖는 역설적 특이성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고 개인적일 밖에 없는 감성적 판단 – ‚행복해요’- 우리라는 집합적 주어와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에서만 기인하지 않는다. 여기서 내면적, 표현적 진술은 고층빌딩 옥상에 커다란 크기로 문자화됨으로써 매우 강한 수신자 지향적konativ’[4] 형태로 말해지고 있는데, 이를통해 행복하다 주관적, 내면적 진술은 되도록 많은 수취인들에게 광범위하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자본주의적 상품 광고(廣告) – „ 상품을 구입하고 나서 얼마나 행복해졌는지 몰라요!“ – 유사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행복 했어요혹은 행복할 거예요 아닌 행복해요라는 현재형 진술은 모든 현재형 문장들과 마찬가지로 말해진 문자를 통해 정작 문자의 배후에 있던 사건과 사태를 숨기고 있다. „나는 꿈을 꾼다라는 문장이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꿈을 꾼다라는 문자를 쓰고 있던 은폐시키듯, „우리는 행복해요라는 문장은 행복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행복하다는 문자를 쓰고 있던 우리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요구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완전하게 실현된 행복, 그래서 영원하게 행복으로 충만한 현재를 말하고 싶었던 문자는 그를통해 곳에서 파라다이스적 과거에 대한 회고도, 유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동경도, ‚인민의 심장 속에 영원할죽은 지도자를 통해 대체되어 있음을 폭로하고 있다.  

 
 
 
 
참고문헌
 
  1. Roman Jakobson : Linguistik und Poetik. In Poetik. S.91.
  2. Roman Jakobson : Linguistik und Poetik. In Poetik. S.92.
  3. Roman Jakobson : Linguistik und Poetik. In Poetik. S.92.
  4. Roman Jakobson : Linguistik und Poetik. In Poetik. S.90
출처 : 비평고원(Critical Plateaux)
글쓴이 : 김남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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