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문자, 미디어

전달이 아닌, 표현과 발현으로서의 언어

김남시 2007. 2. 7. 18:37

 

이제 살인 우노는 당사자의 면전에서도 그에 대한 거부를 말하는데 전혀 꺼리낌이 없다. „나는 아빠 좋아. 엄마 좋아.“ 말을 들으면서도 내가 상처받지 않는 이유는 우노의 말이 나에대한 비난이나 공격이 아니라는 것을, 다른 사람의 내부로 침투해 들어가 그를 상처입히는 전달 언어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수신자를 향해있지 않은 순전한 녀석의 발현과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녀석의 말은 자체로 그저 외부를 향해 발설되는 녀석의 발현이다. 마치 하늘이 자신의 푸른 색을 전달하지않고 그저 드러내듯,  전등의 특정한 이를 향한 전달 아니라 다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속성의 발현이듯 말이다. 푸른색을 전달 우울하게 했던 하늘을, 내게 빛을 쏘아댐으로써 눈을 부시게했던 전등을  비난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일이듯, 순전한 발현과 표현으로서의 아이의 말에 대해 아이의 편협함과 어리석음을 마음 속으로나마 비난하고 그에 상처받는건 정신분열적 반응일 것이다.

 

아이에게 말이 마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두드리는 책상이 소리를 내듯 그저 그를통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발현과 표현인 , 그의 말은 말을 듣고 상처를 받을지 모를 수신자를 고려해 억압되고 제한된 전달로서의 언어와 구별된다. 아이는 아직 자신의 말을 들을 타인을 고려해 자신의 발현과 표현을 억압하거나 규제해야하는 전달로서의 말의 기능에 적응하지 않았고, 그런 점에서 그는 말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는데 있어 행복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교육과 사회화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그래서 행복한 아이의 세계를 타인들에 대한 고려를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적 규범과 가치에 따라 재조직하는데 있다면, 아이에게 그것은 말이 단지 자신의 발현과 표현만이 아닌 전달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자신이 하는 말이 단지 자신의 만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는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말들을, 나아가 모든 표현과 발현들을 전달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바람에 회전하는 풍차를 자신에게 덤벼드는 용으로, 줄에 걸린  빨래를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옷입은 말탄 기사로 생각하는 돈키호테적 패러노이드에 빠져드는 것이다. 표현과 발현으로서의, 순수한 드러냄으로서의 말이 지닌 자립성을 전달성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이런 패러노이드적 사고는 말을 악함 선함’, ‚더러움 깨끗함 범주로 이분시킨다. 속에서 우리의 모든 육체적, 언어적 발현과 표현들은 누군가에 대한 공격과 비난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는 무기로,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을 공격하는악마적인 것으로 변화하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육체적, 언어적 발현과 표현들을 감시하고 억압하며 컨트롤하게 한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우리가 실천할 있는 있다면 누군가의 말을, 혹은 그의 표정과 행동을, 나아가 쓰여진 글을 그것이 나에 대한 전달이라는 분명한 기호와 함께 발현되었을 때에만 전달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기 까지 누군가의 혹은 글과 그의 표정과 행동은, 마치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가 시냇물의 표현과 발현이듯, 그저 사람의 표현과 발현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가 시냇물 소리로 인해 기분이 좋아지거나, 혹은 나빠질 수는 있어도 때문에 시냇물을 비난하거나 칭찬할 없는 것처럼, 단지 누군가의 표현과 발현 때문에 그를 비난하거나 칭송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우스꽝스러운 패러노이드로 만드는 것이라는 깨닫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