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과 문화

보험과 자본주의적 안심

김남시 2006. 12. 26. 08:16

 

 

인간은 현존하지 않는 것,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들을 사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다른 동물들이 이미 현존하고 있는 세계에 적응해 살아가는데 반해, 인간은 이 세계에 현존하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고 꿈꿀 수 있음으로 해서 현존하는 세계를 바꾸고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지금, 현재엔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미리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선취 (Protention) 능력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현존하는 세계에 적응해 살아가는 다른 동물들이 늘 현재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데 반해, 현존하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고 선취할 수 있는 인간은 지금, 현재엔 존재하지 않으나 언젠가 존재하고 생겨날 수 있을 가능한 세계를 생각한다. 우리가 지금, 현재의 자신의 을 살면서도 그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죽음의 가능성을 선취하고 그에 대한 선험적 불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바로 인간이 현존하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고 꿈꿀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들이 눈 앞에 위험이 직면해서야 비로소 그를 피하기 위해 행동하는데 반해, 인간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일어날 수 있을 가능한 위험과 위협에 대해 미리부터, 선험적으로 불안해 한다.

 

우리의 삶이 아직 자연의 순환과 리듬 속에서 움직이고 있을 때 그리하여 우리가 자신의 삶과 죽음을 저 자연의 순환과 리듬에 견주어 예측할 수 있었을때 세계 내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본연적인 불안[1]은 삶의 자연적 순환성을 통해 완화될 수 있었다. 꽃이 피고 지며, 씨를 뿌리고, 그것이 움트며 파종하고 수확하는 삶의 리듬 속에서 살아가던 인간은 자연적 존재로서의 자신의 삶의 종말과 죽음을 어느정도 예견할 수 있었고 그를통해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혹은 집단적으로 준비할 수 있었다.[2] 마을 공동체적 삶과 부모로부터 세습되는 직업 등의 삶의 조건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미래에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나아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며, 어디에 묻힐 것인지 까지를 예측할 수 있게 했다. 자신의 삶과 죽음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하던 이런 삶의 조건 속에서 인간 존재의 선험적 불안은 삶의 자연화와 예측 가능성 속에서 완화될 수 있었다.      

 

근대화와 도시화의 삶의 조건은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조망과 예측 가능성을 파괴함으로써 저 근원적 불안을 증폭시켰다. 자연의 순환 과정으로부터 인위적으로 분리된 현대 도시에서 삶이 인위적 생산의 리듬에 종속되면서, 저 시작과 끝을 모르는 생산 과정에 편입된 인간은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조망을 상실했다. 기계화, 산업화된 일상 속에서 우리의 삶은 하루에도 수십, 수백 건씩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 속에서 예기치 못하게 죽거나 다칠 가능성에 노출되었고, 세습과 공동체의 원리가 아닌 개인의 능력과 경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직업 생활과 경쟁적 사회체제는 자신의 미래의 삶에 대한 조망을 어렵게 했다. 십 년 후 자신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예상하기 힘들어지는 것에 비례해, 우리가 어떻게, 언제, 어떤 식의 죽음을 맞이하게 될 지는 더더욱 알기 어렵게 되었다. 현대 자본주의적 삶의 조건들에서 생겨나는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런 불투명성은 인간 내부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던 근원적 불안을 급속한 속도로 풀어 놓았다. (1900년대 초 자본주의적 삶의 조건들이 사회 전반에 걸쳐 전통적 삶의 형태를 대체해 나가던 시기에 발생한 문학, 미술, 철학 등에서의 실존적 위기 의식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

     

그러나 놀라운 자본주의의 적응력은 사회적 불안정과 위기로 분출될 수 있었을 저 근원적 불안의 방출을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에 따라 극복하게 하는 사회적 안전 장치를 만들어 내었다. 보험이 그것이다. 보험은 우리의 일상적 삶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위협들의 한 가운데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누구도 일상의 한 복판에 숨어 우릴 노리고 있는 저 위협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하루에도 수 없이 전해듣는 교통사고, 화재, 강도나 상해, 갑작스런 질병과 퇴직, 사망 소식은 그 위에서 보험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다.

 

원리적으로 보험은 사건과 사고를 미리 예방해 주지 않는다. 자동차 보험과 화재 보험에 가입했다고 해서 가입자에게 그 사고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보험은 다만 잠재적 가능성으로서의 사고가 실현된 후 사후적으로 그를 보상해주기 위한 제도다.  보험에 가입하는 순간 우리는 이전까지 다만 가능성 그 자체 an sich ’로만 존재했던 우리 일상 속의 사건과 사고들을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fuer sich 현실적 가능성으로 받아들인다. 현대사회의 삶 일반을 규정하고 있는 사건과 사고의 가능성을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현실적 가능성으로 수용함으로써 우리는 지금까지 고집하고 있었던 자기 자신의 예외적 불가침의 환상 내겐 그런 사고가 일어날 리 없어! - 을 포기하고 그 환상을 가능케 했던 개인의 특수성을  일상의 불확실성이라는 현대적 삶의 일반성에로 해소시키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는 일상의 불확실성을 자기 삶의 가능성으로 수용함으로써 보험 가입자는 모순적 성격의 안심을 구매하게 되는데, 보험에 가입함으로써 얻게되는 안심의 모순성은 그것이, 사고의 가능성들로부터 고집스럽게 자신을 예외시켜놓던 동안 우릴 지배하고 있었던 모종의 불안감을 자신의 예외성과 함께 포기하는데에 존재한다. 보험에 가입함으로써 얻게되는 안심이란 그를통해 이제 자신에겐 아무 사고도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예외와 불가침의 확실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안심은 오히려, 이제 자신도 사고를 일으키거나 당할 수 있으며 만일 이 가능성이 현실화 되었을 때, 곧 정말 그가 사고를 내거나 당했을 경우 사후에 그를 보상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안심은 사건과 사고의 가능성을 자신의 현실성으로 수용하고 난 이후의 자신의 삶에 대한 전망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사고를 내 보상해주어야 할 경우 자신에게 닥칠 경제적 위기, 혹은 자신이 사고를 당해 일을 하지 못하거나 치료를 받아야 할 경우 생겨나는 경제적 문제, 혹은 자신이 다치거나 죽은 후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닥칠 경제적 어려움 등, 보험이 보상 해주는, 그를통해 보험에 가입한 우리를 안심하게 하는 대상은 실제 그 보험이 명목상 대상으로 하는 사건과 사고가 일어난 이후의, 우리 혹은 타인의 사후적 삶이다. 우린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과 사고의 사후적 보상을 위해 현재의 자신의 삶을 그 사건과 사고의 가능성 하에 편입시키고, 이를통해 현존하지도 않는 사건에 대한 불안을 보험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해소시키려는 것이다.      

 

보험이 전제하고, 만들어내는 이러한 독특한 안심의 메커니즘에 필수적인 또 하나의 전제조건이 있다. 예방이 아닌 보상의 원리에 기인하고 있는 보험은 구체적인 사건과 사고를 통해 상실되는 모든 것들을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다 보상해 줄 수 있는 매체, ‚의 출현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것이 보험제도가 비로소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생겨나고 가능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

 

자본주의 하에서 돈은 모든 대상들과 교환 가능한 보편성, 따라서 그 모든 대상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전능함[3]을 그 특성으로 갖는다. 자본주의적 삶의 관계가 확장되어 갈수록, 기술의 발전이 이전까지의 가능성의 세계를 확장시킬수록 돈으로 교환 가능한 세계의 대상들과 그를통해 얻을 수 있는 능력들은 그에 비례해 성장해왔다. 1867년 마르크스가 스스로 모든 것으로 변모하고, 또한  모든 것을 팔고 살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돈의 힘[4]에 대해 말했을 때의 저 모든 것 Alles’에는 그 이후 오늘날까지 인류가 만들고 이루어왔던 모든 물건과 기술, 능력 들도 포함되어야 한다.

 

저 모든 것들과 교환할 수 있는 돈은 보험이 근거하고 있는 보상의 원리를 실현시키기에 가장 적합한 매체다. 수많은 물건(상품)들이 갖는 서로 다른 사용가치들을 그것의 교환가치에 따라 동질화시켜 서로 교환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돈은, 서로 다른 사건과 사고의 종류에 따라 생겨난 서로 다른 종류의 손실과 파괴, 상실 등을 동일한 양적 기준에 따라 보상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보편적 교환 매체 돈의 도움으로 보험은 사고를 당해 절단된 팔과 다리도, 불타버린 집과 물건들도, 사망한 가족이나 친지들도 그것의 인간적, 질적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모두 보상해 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보상의 원리에 의해 우리는 교통 사고로 사망한 가족에 대해 느끼는 우리의 인간적 상실감의 크기를 보험 회사가 지급하는 보험금의 액수와 비교 하도록 강요 당한다.)

 

보험이 그것이 제공하는 자본주의적 안심의 메커니즘을 통해 현존하지는 않지만 존재할 수 있는위험들에 대해 갖는 우리의 불안을 상쇄시켜 주는 한,  그건 내 것은 아니지만 내 것일 수  있는세상의 소유를 꿈꾸게 하는 로또와 동일한, 인간의 실존적 조건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세상의 모든 것들과 교환 가능한, 돈의 보편적 실현 가능성을 자신의 원리로 가지고 있다. 보험이 근거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원리가 그것의 모든 인간적 외관들을 뚫고 자신을 드러낼 때 우리가 느끼는 낯설음  - 남편의 사망 보험금으로 10억을 받은 부인! – 은 다만 우리가 우리의 삶 깊숙한 곳에서 작동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자명성에 대해 잠시 망각하고 있던 데에서 기인한다.         

 

                



[1] Vgl. M. Heidegger : Sein und Zeit, § 39, S.249.

[2] Vgl. Philippe Ariès : Studien zur Geschichte des Todes im Abendland, 1981 München.

[3] K. Marx: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 S. 191. vgl. MEW Bd. 40, S. 563.

[4] K. Marx :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Drittes Kapitel. 3. Geld. S.1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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