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탄핵정국과 스페인 테러

김남시 2004. 3. 17. 03:44
한국의 탄핵정국과 그로인한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에 대한 독일 언론의 반응을 엿듣기 위해 이곳 독일 신문을 집어 들면서 신문 1면에 커다랗게 나온 사진 한장이 눈에 뜨였다. 시청 앞 분수대 처럼 보이는 커다란 광장과 이어진 도로에 끝이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행진하고 있는 사진이였다.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탄핵반대 촛불시위 장면이 독일 신문 1면을 장식할 정도였던가! 고 경탄하던 나는 이후 그 사진이 서울이 아닌, 스페인의 마드리드 거리였음을, 거기 모인 사람들은 며칠전 있었던 기차 테러사건으로 죽은 200여명의 무고한 시민들을 추모하기 위해 촛불을 들고 모인 스페인인들이었음을 확인해야 했다.

신문은 이어서 스페인 테러가 있은 며칠뒤 실시된 스페인 총선결과를 함께 보도하고 있었다. 테러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회주의자 자파테로가 현 집권 보수당을 제치고 당선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당선은 스페인 기차폭탄 테러사건을 계기로  폭발된 스페인 국민들의 분노의 결과이기도 했다. 스페인 역사상 내전 이후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이번 기차 테러사건의 배후로 이슬람 테러조직이 연루되어 있음이 점점 확실시되어가던 중에도 스페인 집권 보수당은 이 테러가 스페인내 테러조직인 ATA의 소행이라고 강변하고 있었다. 대다수 스페인 국민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이라크에 군인을 파견했던 집권세력의 입장에서는 이번 테러가 바로 스페인의 이라크 파병에 대한 이슬람 측의 보복 테러였음을 공표함으로써 국민들의 원성을 사고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국민들을 무시한 집권당의 파병과 200 여명이 희생된 테러 앞에서 거짓말을 일삼는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희생자 추도 촛불 시위를 정권반대 시위로 이어지게 했으며, 이어 실시된 총선에서 결국 집권당을 패배시키는 결과로 드러난 것이었다. 새로 당선된 사회주의당 자파테로는 곧 이라크에 파병되어 있는 1300명의 스페인 군을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이러한 새 스페인 수상의 결정에 곤혹스러워 하면서도 사실상 이라크에 파병되있는 스페인 병력이 1300 명에 불과하며 그들의 철수가 미국의 이라크 전략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자위했다. 이를 계기로 독일 신문엔 이라크에 어떤 나라가 얼만큼의 병력을 파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도표를 게시하였다. 그리고 이 도표는 나에게 매우 놀랍고도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슬람 테러조직의 보복테러로 200 여명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이 이라크에 파병하고 있는 병력이 고작 1300명에 불과한 것에 비해, 한국은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번째로 많은 3600 명의 군인을 이라크에 파병하고 있었다! 미국, 영국과 더불어 이라크를 삼분하여 관할하고 있는 스페인과 폴란드의 파병군인을 모두 합쳐보아야 2600 명에 불과했다. 한국은 미국의 대이라크 정책에 우호적인 그 어떤 유럽국가 보다도 많은 군인들을 소리 소문없이 이미 이라크에 파병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황을 알게되자 난 신문 첫 면의 촛불시위 사진이 한국의 그것과 겹쳐져 보여졌던 것이 어쩌면 우연이 아니라고 느끼게 되었다. 1300명의 군인을 파견했던 스페인이 이로인해 200여 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은 테러를 경험해야 했다면, 전쟁 당사국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번째로 많은 군인을 파병하고 있는 한국은 그 얼마나 커다란 테러의 위협에 처해있는 것인가.   탄핵으로 직무가 정지된 대통령과 그를 탄핵으로 몰고간 야당 모두가 합의했던 파병에 의해 우리 국민들은 상상하지 못할 무차별적인 테러의 위협에 내던져져 있는 것이 아닌가!  

국정의 마비, 정치적 혼란과 거대한 국가적 손실로 나라를 이끌고 간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로 온 국민이 거리로 나서고 있는 지금,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우리 국민들의 신변을 진정으로 염려하는 어떤 정치세력도 대안으로 갖고있지 못하다. 탄핵으로 대통령을 직무정지시킨 야당이 집권하든, 아니면 대통령이 다시 권한을 회복하든 상관없이 전쟁 당사국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군인을 이라크에 파병하고 있는 한국의 국민은 어쩌면 스페인의 그것보다 더 큰 위협에 내맡겨져 있는 셈이다.

미국의 이라크 주둔이 더욱 더 정치적, 외교적 정당성을 잃어가고 있는 지금,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거리 시위에서 탄핵 반대만이 아닌, 이라크 주둔병력 철수와 추가파병 반대를 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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