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과 문화

니클라스 루만의 카드상자

김남시 2004. 2. 24. 06:21
루만의 인터뷰 글을 읽었다.

루만은 25세때부터 자신의 평생을 계획하고 매일 책을 읽을때마다 독서 카드를 작성하여 지금까지 모았다. 그의 Zettel Kasten은 그가 글을 쓰는 데 없어서는 안될 자료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기억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자신이 책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과 책에서 얻은 생각들을 모두 카드에다 적어 정리하고 보관하는 방법을 택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책을 쓸때에는 이렇게 수집되고 그 주제에 따라 분류된 ‚생각들’을 이리저리 조합함으로써 생겨나는 새로운 조합과 구조의 가능성을 실험한다.

그의 카드상자는 이처럼 새롭게 조합함으로써 새로운 정보를 생성해내는 정보창고의 기능을 행하고 루만의 사유는 다만 그 정보들을 이리저리 조합해 봄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해보는 Operative 한 기능을 행한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하고 있듯, 인간이 습득한 지식과 정보, 경험이 인간의 사유방식과 구조 자체를 질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지식과 사유에 대한 믿음위에서 소위 ‚숙고’의 가능성이 열린다. 곧, 내 속에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지식, 경험들이 어떤 식으로든 축적되고 작용하고 있어서 난 다만 하나의 문제를 골똘히, 충분히 깊이 사유하기만 하면, 나의 이전의 모든 경험들과 지식들의 바탕 위에서 사유를 이끌어 갈 수 있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소위 현자나 지혜로운 자에 대한 표상은, 그가 다만 남들보다 많은 지식을 머리 속에 보관하고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러한 많은 지식과 경험들을 통해 그의 사유방식 자체가 질적으로 상승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루만은, 그리고 그의 카드상자는 우리의 두뇌를 다만 컴퓨터 작동에 필요한 작동 시스템 정도로 이해한다. 우리가 읽었던 지식, 습득한 경험들은 그 작동 시스템 자체를 질적으로 변화시키지 않고 다만 그 작동시스템에 의해 처리되고 고려 될 정보들에 다름아니다. 그리고 그 정보들은 우리가 따로 입력시키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그저 카드상자에 쌓인채 나의 사유와 결정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루만의 카드상자와 관련된 기억의 문제를 생각하다가 ‚경험’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의 기억을 우리가 획득했던 지식과 경험들을 스스로 소화하고 체득, 체화함으로써 스스로 사유하는 방식과 수준 자체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어떤 유기체같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리하여 내가 당장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 경험, 그 지식은 나의 기억 어디엔가 육체적으로 체화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경험과 지식의 축적이 나의 사유 자체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저 현자와 지혜로운 자의 이미지에서처럼, 나이 먹은 이들은, 그리고 벤야민이 경고했던, 삶을 많이 살아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더 나은 방식으로 사유할 것이다.

그러나, 기억이 다만 우리가 아는 이들의 전화번호를 적어놓듯, 점점 더 아는 사람들이 많아 질수록 그들의 전화번호가 더 많아지듯, 그렇게 축적되고, 쌓이기만 하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필요로 할 때 난 그의 이름을 찾아 그의 전화번호를 읽어야만 비로소 그의 전화번호가 나의 이후 행동에 영향을 끼칠수 있는 것처럼 그러한 정보에 다름아니라면, 그리하여 지식과 경험들은 우리의 사유에 의해 체화되고 체득됨으로써 사유 자체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양적인 정보들이 축적되고 모여지는 것이라면, 우린 더 이상 오랜 경험과 연륜을 통해 더 나은, 질적으로 뛰어난 사유를 하는 현자나 지혜로운 자들을 상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지식과 경험이 우리의 사유를 발전시키는가.

보다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더 뛰어난, 더 올바른 사유과 결단을 내릴 수 있는가.

특정한 문제를 생각할 때 이미 다른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해 했었던 수많은 사유의 가능성을 ‚알고있다면’ 그는 그 문제를 보다 다각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고 그에대해 사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위의 질문은 긍정적으로 답변된다.

그러나, 그 지식과 경험을 ‚알고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물어져야 한다. 특정한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갖고있다는 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그 부분에 대해 많은 책을 읽고 경험을 했다는 것을 일단 말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물론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경험을 했지만 그 경험과 지식들을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의 경험과 지식은 지금의 문제를 사유하는데 어떤 식으로 적용되고 활용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떤 문제를 사유하는데 있어서의 뛰어남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유의 가능성과 경험, 그와 관련된 지식들을 ‚기억’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할수 있다.

누군가의 말, 누군가의 책과 이론을 이해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난 칸트를 읽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얼마 후 내가 내가 이해했던 칸트의 복잡한 이론구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그 이해는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물건과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장실  (0) 2004.02.24
지하실 창고  (0) 2004.02.24
도장과 사인  (0) 2004.02.24
폴 브릴리오, 공공장소의 사진  (0) 2004.02.23
사적 소유와 감각의 해방  (0) 2004.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