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과 문화

폴 브릴리오, 공공장소의 사진

김남시 2004. 2. 23. 01:03
 

Paul Virilio, Das öffentliche Bild, in Digitaler Schein : Ästhetik der elektronischen Medien, (hg,) Florian Rötzer, 1991, Shurkamp


상품광고 사진을 분석하고 있는 이 글에서 브릴리오는 오늘날 고화질의 사진기술이 상품과 인간, 물건과 인간과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지적하고 있다. 과거와 과거에 일어났던 일, 과거에 보았던 물건들을 기억하기 위한 기억의 보조수단에 다름 아니었던 사진이 이제 상품광고 플래카트와 카타로그에서는 그 물건들을 통해 우리의 삶의 변화를 약속하는 미래를 독점하고있다. 상품이 우리에게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모습’을 약속함으로써 구매력을 갖는다면, 상품과 그 상품에 대한 우리의 욕구는 현재와는 다르게 펼쳐져야할 미래에 대한 욕구에 다름 아니다. 새 세탁기는 보다 조용하고 쾌적하게 우리의 가사일을 덜어줄 것이며, 난 그 시간에 이제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을수 있을 것이다. 저 자동차는 만원버스에 시달리는 고달픈 출퇴근 시간을 크래식 음악을 들으며 쾌적하게 난방된 자동차 안에서 즐길 수 있게 할 것이다. 등등. 이 새 DVD 플레이어는 이제 가족들이 함께 모여앉아 영화를 보는 화애로운 미래를 약속할 것이다. 상품 카타로그는 그를통해 그 상품들을 통해 변해야 할 내 삶의 미래의 모습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잘 불러낼수 있는가에 그 성패가 달려있다. 난 한 권의 상품 카타로그를 보면서 보다 쾌적하고, 우아하고, 화목하며 아름답게 변할 나의 미래를 상상할수 있다.

 

내 삶이 저 상품들이 약속하는 미래의 모습대로 변하는 것을 기대하는 만큼 저 상품들은 지금 현재의 나의 삶에 결핍되어 있는 것들을 상기시켜 준다. 내게 저 세탁기가 없다면 난 힘겹게 빨래를 해야 할 것이며, 여전히 만원버스와 매연에 시달리며 출퇴근해야 할 것이며, 가족들은 한 자리에 모이지 않게 될 것이다. 저 상품들을 가지고 있지 못한 나의 현재의 삶은 그리하여 저 상품들을 통해 펼쳐지게 될 내 미래의 삶과 비교되고, 평가절하되고 비참하고 불행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오, 세탁기와 자동차와, DVD 플레이어가 없는 나의 삶은 얼마나 괴롭고 힘들며 불행한 것인가. 내 삶의 불행함에 대한 집착은 드디어 어떤 식으로든지 저 상품을 구입할때까지 날 물고늘어지는 병균처럼 내 몸에 붙어있다. 그리고 난 어떤 식으로든 내 삶을 저 상품들을 통해 아름답고 쾌적하고 행복한 것으로 변화시켜야만 한다.


우리는 그 사진들을 통해 멀리 떨어져있는 물건들을 바로 우리 눈 앞에서 ‚볼’ 수 fern sehen 있을 뿐만아니라, 물건을 주문하는 fern handeln 행위를 할 수도 있다.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서 예전엔 그 물건을 보고, 만져보고, 들여다보고, 들어보고, 흔들어보는 등의 많은 육체적 접촉이 필요했었다. 우린 그를통해 그 물건의 가치를 확인하고 그것이 내게 가져다 줄 사용가치를 점검하고 내가 지불할만큼의 교환 가치를 갖고 있는지 검토한다. 마치 동물들이 냄새맡고 흔들어보고 조심스럽게 만져보고 나서야 자신의 먹이감을 입에 넣듯이 그렇게 우린 우리의 육체와 물건과의 접촉을 통해 그 물건을 나의 소유로 만드는 구입행위를 하는 것이다.

 

카타로그를 통해 혹은 티브이 화면을 통해 물건을 구입하는 통신판매는 나의 육체와 물건과의 접촉이 생략되어 있다. 난 내가 구입할 물건을 다만 사진과 화면으로만 본다. 저 상품판매자에 의해 제공되는 사진과 화면은 나의 육체와 물건과의 접촉을 대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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