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과 문화

도장과 사인

김남시 2004. 2. 24. 06:18
한국에서 난 내 진정성의 증거물로 남기는 도장을 내 손으로 휘갈겨 쓰는 싸인보다 더 오텐티쉬한 것으로 여겼다. 도장은 그 소유의 제한으로 인해 그 진정성을 보장 받는다. 임금의 옥새를 아무나 가지고 있을수 없듯이 나의 도장은 나 만이 소유하고 있음으로 해서, 나의 도장이 찍힌 문서는 나의 정신적 현존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에반해 싸인은 내게는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나의 싸인은 그 누구라도 위조할수 있으며, 나의 필적을 위조할 수 있는 사람은 그를통해 나의 정신적 현존을 위증하는 것이니, 싸인이란 그 얼마나 허술한 진정성의 매체란 말인가.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난 나의 생각을 바꾸게되었다. 그건 저 도장, 나 만의 유일한 정신적 현존을 증거해야할 도장에 대한 독점적 소유가 사실상 가능하지 않음을 깨닫고 나서였다. 나의 도장은 그 누구라도 가질 수 있다! 누군가가 나의 도장과 똑같은 도장을 만들어 사용한다면, 내 도장의 진정성은 더이상 보장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내 필적을 통해 내 육체의 운동을 증거하는 싸인은 바로 그러한 육체적 운동을 통해 오히려 나의 육체적 현존을 강하게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도장을 가진 그 누군가는 심지어 내가 죽은 후에도 나의 현전과 정신적 유예를 위조할수 있지만, 싸인은 내가 죽으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 이러한 생각을 더욱 강화시켜주었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과 아시아에서의 도장 문화는 소위 도장의 복제라는 것이 규범적으로 그리고 이념적으로 불가능했던 시대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임금의 옥새를 만들었던 장인은 죽음을 각오하고서야 똑같은 도장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도장을 만들고 새길 수 있는 장인의 수와 교육은 기술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규제되었을 것이며, 그를통해 한 인물의 진정성을 담지해야 할 도장의 유일성은 그를보장하는 그 사회의 규범적, 제도적, 이념적 원리에 의존하고 있었을 것이다.

복제기술을 통한 아우라의 상실은 어쩌면 저 도장의 복제가 가능해진 시대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 내 도장, 나의 유일한 진정한 현존의 증거물로서의 도장의 지위가 상실되었던 것과 유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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