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토크 53호는 <자해 그리고 자살>을 특집으로 삼았다. 책장을 들추면 사라 내번의 사진이 나온다. 피묻은 마스크, 피처럼 보이는 안료로 벽에 남긴 기괴한 낙서, 오래 걷거나 뛰어 물집 잡힌 발, 허름한 침대에 벌거벗은채 누워 팔로 얼굴을 가린 작가의 모습이 담겼다. 이 사진들 곁에 이런 텍스트가 있다.
“이 사진을 찍고, 또 사진 속에 등장하는 사라 내번은 양극성 장애로 집과 병원을 오가는 가운데에서 카메라를 들었다. 일기를 쓰듯이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낸 사진들은 웃음과 울음이 교차하는 이미지처럼 충동과 삶의 의지 사이에서 진동한다. 내번의 작업은 일상에서 나타나는 자신의 증상을 해부학 실험처럼 카메라로 도려내 가감없이 들여다본다...작가는 카메라와 사진을 통해 필터링 없이 자신의 이미지와 대면한다. 자살을 시도한 흔적이 고스란히 나타난 사진을 바라보며 스스로 묻는다. 어떻게 그 충동에서 벗어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두번째는 Charlie Tallott의 작업이다. 어두운 밤 옷을 벗고 폭포를 껴안으려는 듯 두 팔을 벌리고 남자, 맨발과 토플리스 차림으로 비오는 거리를 달리는 여자, 등판에 길고 붉은 손톱자국이 난 남성 사진 들이다. “2021년 그는 자살을 시도했다. 실패 후 그는 3개월간 영국 국민건강보험 위기 관리팀의 치료를 받았고, 병동에 수용되면서 하루에 딱 한시간만 외출이 허락되었다...탈롯은 그 한 시간을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카메라를 들고 ‘황홀하고 행복하며 유토피아적인 이미지’를 찾아나서는 일이었다.”
사진이 보편화되기 전에도 분명 우울증, 양극성 장애, 자살 충동이나 자해 욕구 같은 심리적 위기를 맞이하는 작가들은 있었고, 그들은 그 과정을 글로 혹은 그림으로 기록하며 또 견뎌냈을 것이다. 사진보다 시간이 걸리는 글쓰기나 그리기의 과정에서 그들의 심리적 위기는 다르게 매개되고 다른 형식으로 번역될 시간적, 심리적 간극을 얻는다. 사진의 경우는 다르다. 사진은 지금, 당장 자신을 내리누르는 감정과 지금 막 나 자신을 몰아친 충동적 행위들을 거의 실시간으로 기록할 수 있게 해주니까. 그래서 이런 가능성도 생겨난다. “자해할 때마다 그 과정과 흉터를 습관적으로 사진 찍”고, 자기 컴퓨터 정크 폴더에 쌓아두었던 천저 Chen Zhe는 그 사진들을 모아 사진집을 출간했다. 여기에는 “한 움큼 뽑힌 머리카락, 여러 번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 선명한 허벅지, 얼굴과 몸에 핏자국이 범벅된 어떤 소녀”, 칼로 그은 자국이 가득하고 피가 흥건한 팔뚝 사진이 실려있다.
이 사진들은 내게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을 촉발한다. 그를 예상한 듯 잡지 편집자는 ‘자해를 하면 안된다’는 믿음에서 비롯해 그들에게 대답할 의미가 있다고 전제하는 강압적인 질문 - “왜, 그러냐고, 이유가 뭐냐”는 질문 - 자체가 ‘또 다른 형태의 은은한 폭력’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 질문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따지듯이 묻기만” 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생일날 자신의 팔을 칼로 긋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내가 이해할 수 있느냐, 없느냐와 상관없이 그가 존재하고, 그가 자해를 하고, 그가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오롯이 보는 일’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의 물음, 아니 질문 혹은 물음이라는 이 중립적이고 젠체하는 표현보다 더 깊은 일말의 질책이나 의심의 무게가 실린 나의 물음은 정작 이런 것이다. 이런 사진을 찍고, 공유하고, 그를 작가로서 자기 작업 주제로 삼아 사진집으로 묶어 출판하는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이 호에 실린 상담심리학자 임민경의 글은 이 질문에 반쯤 주었다. 자해자들은 “무언가를 과시하기”보다는 “자신과 비슷한 감각을 가진 타인을 알아보고 연결되기” 위해 SNS를 찾는다는 것이다. “SNS에 올라오는 자해 이미지는 고통이 말로 전환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잔여물”이며, 그렇기에 우리가 봐야할 것은 “이미지 그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 이전에 들리지 않았던 말들”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자해 이미지를 마주했을 때, ‘무엇이 여기까지 오게 했는가’를 물어야 한다. 문제는 이미지를 올리는 개인이 아니라, 그 고통이 제대로 된 언어와 관계 속에서 다뤄질 수 없었던 환경이다.” 그렇다면 작가들이 이런 사진을 찍고, 전시하고 사진집을 내는 건, 이들의 고통을 ‘제대로 된 언어와 관계 속에서 다루지 못하는 환경’에 대한 문제제기인 것일까? 그런데 그렇다면 이 사진들은 ‘작품’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이것은 윤리적 질문일까, 미학적 질문일까. 칼로 그은 자신의 팔뚝을, 공황상태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순간의 작가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고통스럽다”는 문장은 그를 쓴자의 고통보다는 그를 쓰는 행위를 더 드러내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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