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기차타고서 소나무 심기.

김남시 2011. 2. 5. 02:48

지난 학기 대구에서 수업이 있어 KTX를 자주 이용하였다. 광명 역에서 기차를 타고 동대구 역에 하차, 다시 무궁화로 갈아타는 여정이었는데 동대구 역 출구에 거대한 문구가 눈에 뜨인다. 차를 이용하는 대신 기차를 탄 내가 “41 Kg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였”고 결과적으로 “소나무 8 그루를 심었다”며 날 - 혹은 철도를? - 칭찬하고 있는 플랭카드 였다.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한 일이라곤 기차를 탄 것 뿐인데 마치 내가 행한 것인양 내게 돌아오는 이 칭송의 불균등이? 지금부터 분석해보려 하는 이 논리를 편의상 ‘비현실화된 잠재성의 긍정화 논리’라고 칭하자. 왜냐하면 이 논리는, 우리가 실제적으로 행한 능동적 행동이 아니라, 원리적으로는 행할 수 있었지만 행하지 않고 포기한 것을 긍정화시킴으로써 우리를 칭찬 혹은 위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묘한 산법에 따라 우리가 얻게되는 칭찬, 위로, 자기 만족은 역사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속물성이라는 심연으로부터 구제해 줄 정도로 크며,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 삶 속에서 이 산법은 광범위하게 작동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논리는 원리적으로 우리가 행할 수 있었던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 곧, 아무 것도 행하지 않은 것을 무엇인가를 의지적으로 행한 것으로 탈바꿈시킨다. 다시말해 이 논리는, 대부분은 우리가 의식조차 하지 못하던 우리의 잠재적 행위 가능성들을 긍정화시켜 낸 후, 그 부정적 귀결이 현실화되지 않은 이유가 마치 우리의 의지적 행위에서 기인한 것인양 서술한다. 단지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았을 뿐인 나는 41 Kg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인’ 것이 되고, 비행기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은 나는 같은 항공기 관객들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며, 횡단보도를 그냥 지나가지 않은 나는 그 곳을 건너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한’ 것이 된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을 철로를 향해 떠밀지 않은 나는 그들의 삶의 연장에 ‘기여’한 것이 되며, 육교 아래로 돌을 던지지 않은 나는 그 아래 지나가는 차량의 원할한 흐름을 ‘촉진’한 것이다.

 

그저 기차를 타고,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고, 횡단보도에서 차를 세웠을 뿐인 우리들을 ‘선한’ 도덕적 주체라고 호명하는 이러한 논리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은 여기서 실체적인 것으로 긍정화 Positivierung 된 잠재적 행위 가능성의 크기를 고려해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행할 수 있었으나 행하지 않은 (혹은 못한)것에 의해 누군가가 의지적인 도덕적 주체로 호명되는 한, 그 가상적 포기의 도덕성은 그에게 주어져 있는 잠재적 행위 가능성의 크기에 비례할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잠재적 행위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주체에게는, 그를 실행하지 않음으로써 생겨나는 긍정성, 곧 그를 현실화시키지 않은 기여도는 더 커지게 된다는 것이다. 평상시 자유롭게 비행기를 이용할 수 있던 누군가 - 예를들어 부자 - 가 기차를 탄다면 그가 이산화탄소 배출에 기여한 정도는, 평소 자동차만 이용하는 내가 기차를 탄 것보다 크다. 미사일을 발사해 도시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가진 인물 - 예를들어 정치적 결정권자 - 이 그를 행하지 않은 것은, 이웃집 창문에 돌을 던질 가능성 정도만 가지고 있는 내가 그를 포기한 것보다 훨씬 더 큰 도덕적 행위가 된다. 곧, 경제적 조건에 의해 혹은 정치, 사회적 지위로 인해 나보다 더 큰 잠재적 행위 가능성을 부여받은 주체는 이미 그것만으로도 이 세계의 평화와 환경, 도덕적 선함에 기여할 수 있는 정도가 나보다 훨씬 큰 것이다.

 

그냥 기차를 탔을 뿐인데 내가 ‘소나무 8그루를 심었다’고 말해주는 이 구차한 ‘참여 Engagement'의 논리는, 자신의 앞가림 말고는 사회적 정의, 환경, 인권이나 세계평화 따위에는 무관심해진 현재의 우리들에게 정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어떤 사회적 실천도 좀처럼 권유할 수 없게된 탈가치화의 조건 속에서, 그 어떤 작은 사회적 실천도 하고있지 않은 우리의 소시민적 삶을 이런 방식으로 긍정하고 예찬해주는 데에서 출구를 찾으려는 것은 아닌가? 이는 세상에, 혹은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재앙과 악의 가능성을 전제하고, 그것이 일어나지 않음을 역으로 감사해하고, 행복하다고 여겨야 한다는, 자기위안의 종교적 논리의 뒷면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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