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북한영화> 한 녀학생의 일기

김남시 2009. 7. 3. 15:55

 

혹시라도 내가 북한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에 시비를 걸 사람들을 위해 한 마디. <한 녀학생의 일기> 2007년 북한에서 개봉되어  북한에서만 8백만이 넘는 관객을 끌었던 흥행 영화다. 이러한 성공으로 인해 이 영화는, 오늘날 세계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북한의 정치 문화를 신비하고도 엑조틱한 매력으로 느끼는 유럽인들의 관심을 사, 깐느 영화제에서도 상영된 바 있다.  그 후 프랑스의 한 영화 배급업체에 의해 공식 DVD가 발매되어 판매 중이라 유럽에서는 누구나 볼 수 있다. (한국에서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감독 스스로가 예술영화 부르고 북한 영화 역사상 하나의 기점 이루는 작품이라고 일컫어지는  영화에 대해 주연 배우 박미향은 인터뷰(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3691) 에서 사상 주제적 관점은 크게 제기하지 않지만, 자그마한 소재에 아기자기한 생활을 담고있다 말한다. 실제로 영화에선 간지러운 장군님 지도자 동지 대한 칭송은 간접적 등장인물이 생일 부르는 노래가사를 통해서 으로만 나온다.  과학원 조종 기계 연구실 김사명 실장의 실화에 토대해 만들어졌다는 영화는 외세에 대항하는 민족의식 고양시키거나 사회주의 조국 건설에 매진하자 등의 노골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보다는  가족의 가족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하다. 이는   녀학생의 일기라는 개인화된 제목을 통해서도 암시되어 있다.

 

수련은 집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과학자인 아버지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공장/연구실에서 낮으로 연구에 매달리느라 거의 집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래서 집엔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어머니와 수련, 수련의 할머니와 여동생 4명의 여자들만 살고있다. 수련은 집안일을 돌보지 않는 이런 아버지가 무척이나 못마땅하다. 재래식 부엌에 낡은 굴뚝이 막혔는데도 그를 뚫어줄 사람이 없고,  전기 합선으로 인해 불이 뻔하는 몇몇 위기들을 겪으면서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수련의 불만은 증폭된다. 간혹 집을 방문한다고 하루종일 아버지를 기다렸건만 식구들의 기대를 무너뜨리면서 아버지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기 일수다. 그나마 어느 모두가 잠들었을 도둑처럼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그를 목놓아 기다린 수련과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기는 커녕 다시 책을 들여다 보며 자기 연구에만 몰두한다. 물리적으로도 이렇게 감정적/정서적으로도 부재하는 아버지는 수련이 이과대학에 진학해 과학자가 것인지 문학으로 진로를 정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확고한 신념이 없다 꾸중하기만 한다. 다음날 아침 일찍 다시 연구소로 돌아가야 하는 아버지가 그동안 밀려있던 집안 일을 도와주지는 못하면서 옆집의 일을 해주고 있는 모습을 보고 수련은 적지않은 배신감을 느낀다. 심지어 아버지는, 수련이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나 꿈꾸워왔던 아파트(!) 입주 기회까지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 버린다. 

 

가족을 돌보지 않는 (못하는)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수련의 반발은, 나아가 벌써 동안 아무 연구 성과도 내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해 주위의 의혹과 비난을 겪게 되면서 – „수련인 아버지가 못다 한 일을 마저 해야 돼. 나라에 빚을 졌으면 딸이 대신 갚아야지 뭐.“ - 아버지의 권위 자체에 대한 부정에로까지 이어진다. 같은 경화의 아버지는 박사가 되어 화려하게 환영을 받건만, 부재를 사회적 성공으로도 보상해 주지 못하는 수련의 아버지는 수련에게는 창피하기까지 하다. 이렇게 해서 자라나게된 아버지에 대한 수련의 반감은 급기야 북한 영화에서 저런 대사를 들을 있다는 것이 신기롭게 느껴질 정도의 과격한 대사를 통해 표출된다. „우리 아버지는 정말 머리가 나쁜가?“, „내가 아버지 때문에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나요?“,   한텐 아버지가 없어요!“…

 

이쯤되면 영화는, 무언가 다른, 크고 중요한 일에 신경을 쓰느라 인민들이 먹고 사는 집안일에, 그들의 바램과 요구들을 거의 돌보지 못하던 북한 사회의 거대 아버지’, „친애하는 지도자 대한 북한 인민들의 반감과 반발을 무의식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들이 기아로 굶어죽는 동안에도 다만 상징적으로만 존재하면서 사실상 부재하던 아버지의 아버지의 권위는 이런 방식으로 흔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흥미로운 것은 영화의 이런 갈등구조 속에서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의 역할이다.

 

수련의 삼촌은 부재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아버지 역할을 맡는다. 그는 가끔씩 봉고차를 몰고 수련의 집을 방문해 수련과 동생에게 옷을 사다주고, 수련의 대학 진학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 도움을 준다. 그러면서 가끔씩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제부에 대해 불만을 터뜨린다.

 

수련의 어머니는 부재하는 남편으로 인해 가장 실질적인 고통을 겪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남자가 없는 집안의 소사들을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 힘겹게 돌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편의 연구에 도움이 만한 외국어 논문들을 찾아 퇴근 밤을 새워가면서 번역해 남편에게 보내줄 정도로 헌신적이다. 아버지는 국가를 위해, 어머니는 그런 남편을 위해 헌신한다면 이런 삶의 구조에서 피해를 보는건 제대로 돌보아 사람 없는 자식들일 것이다. 아버지가 없이 자식들과 함께 살고 있는 어머니는 이러한 자식들의 반감과 불만에 맞서 아버지를 변호한다. 그녀는 부재하는 아버지로 인한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의 옹호자이기도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수련의 태도엔 그래서 동정과 반감이 이중으로 겹쳐있다. 아버지가 없어서 고생하는 어머니와의 동일화가 동정을 낳았다면, 그런 아버지를 옹호하는 어머니는 수련의 반감과 불만을 불러낸다. 이를통해 수련과 부재하는 아버지와의 갈등은 수련과 현존하는 어머니 사이의 갈등으로까지 번진다.        

 

 

낮으로 아버지만을 위해 자신을 혹사하는 어머니가 급기야 암에 걸려 수술을 받게되는 지경에 이르러 영화 속의 내적 갈등은 최고도에 달한다. 연구에 몰두해야 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수술 사실 조차 숨기는 어머니를 보다 못한 수련은, 아버지에게 사실을 알리고 병원으로 모시고 오기위해 직접 연구소로 향하는 길을 떠난다. 거기서 만난 아버지는 아내의 수술 사실에 놀라 함께 병원에 가기로 약속하지만, 약속 역시 그에게 밀려드는 급하게 처리해야 일과 회의 일정 때문에 다시 파기되고 만다.

 

갈등을 도무지 해결될 같지 않은 극한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영화는, 많은 다른 북한 영화들이 그렇듯,  극적인 해결이 주는 카타르시스적 효과를 극대화시키려고 한다. 영화에선 갈등은 어떻게 해결될까? 워커홀릭 아버지가 어떤 계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뉘우치고 다시 가족들에게 눈을 돌림으로써? 주목할만하게도 영화가 취한 선택은, 아버지를 성공시키는 길이다. 가족 사이의 갈등이 최고도에 도달한 순간, 아버지는 오랜 동안 실패를 거듭해 연구의 최종적인 성과를 얻는다. 그리고 성과는Deus ex maschina 처럼 마지막에 모든 갈등을 해결해 주는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아버지의 아버지 치하를 통해 사실은 신문 기사를 통해 전해진다 - 최고의 사회적 인정을 받는다. 여기엔 수련이 그토록 가고 싶어하던 아파트로 이사갈 있게 특혜도 포함된다. 아버지가 아버지 조국을 위해 그토록 헌신적으로 노력해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수련에겐 아버지에 대한 그간의 인간적 불만과 반감은 자랑스러움으로 변한다. 과학자냐 작가냐의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수련이,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이과 대학에 진학한다는 마지막 장면은 그동안 상실되었던 아버지의 권위와 신빙성이 다시 회복된다는 것을 상징할 것이다. (인민들을 돌보지 못해 흔들린 지도자 동지 권위는 인민들이 사실상 그가 크고 중요한 문제에 매달리고 있었다는 것을, 언젠가 인민들이 알게된다면 다시 회복될 것이다, 라는게 영화의 무의식적 정치적 메시지다. )  

 

모든 해피 엔딩의 출발점이 결국 아버지의 성공이라는 것은, 북한 사회에서도 아버지의 사회적 성공이 그의 권위의 가장 중요한 근거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권위란 그의 사회적 성패에 달려있는 것이다. 북한과 남한(한국)사회의 차이가 있다면 북한에선 작은 아버지들의 사회적 성패를 결정하고 인정해주는 정치적 최종 심급의 권위인 거대한 아버지 있다면, 한국 사회에선 그것이 없다는 것이다. 일을 하느라 가정을 돌보지 못하는 아버지의 부재는 그래서 여기선 아버지 조국에의 헌신이라는 명분을 통해 정당화되지 못한다. 그를 보상해줄 있는 , 그의 가족이 사는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그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의 지명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