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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피셔 리히테, 수행성의 미학

김남시 2018. 7. 10. 09:33

에리카 피셔-리히테의 Ästhetik des Performativen

 

- 이 책의 이론적 공헌은 퍼포먼스 뿐 아니라 다른 작업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우리가 어떤 퍼포먼스나 작품을 의미론화해서 바라보기 이전에 일어나는, 물질성과의 직접적 만남의 계기를 강조한다.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에서 그녀가 면도칼로 자신의 배에 그린 것이,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부여한 다윗의 별이라는 점을 알아차리고 그것의 상징적 의미를 해석하기 이전에 우리는 먼저 그녀 몸에 피를 내면서 살갗을 파고드는 면도날을 먼저 만난다. 어떤 사건이, 어떤 사물이 무엇을 의미, 지시, 상징하는가에 대한 인지는, 그 사건과 사물의 물질성 자체와의 대면 이후에 일어나는 일이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그 사건, 그 사물의 물질성에 신체적으로 반응한다. 코를 찌르는 냄새, 바로 내 앞에 서 있는 퍼포머의 유약한, 혹은 위압적인, 혹은 피흘리는 신체가 그것이 갖는 의미연상이전에 먼저 다가오는 것이다. (에리카 피셔-리히테는 이를 벤야민의 상징알레고리의 구분과 관련시킨다.)

- 퍼포먼스, 특히 6, 70년대의 퍼포먼스의 효과는 이러한 물질성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니치의 퍼포먼스에 사용된 양의 피, 아브라모비치의 피 흘리고 자학하는 신체, 요셉 보이스의 쟈칼 등은, 그것의 의미를 떠올리기 이전에 그것의 물질성을 통해 관객을 충격에 빠뜨린다. 이 퍼포먼스의 물질성이 단순한 관조자이고자 하는 관객의 수동성을 깨뜨리며 그로 하여금 일정한 반응을 요구했던 것이다.

- 6, 70년대의 퍼포먼스들의 특징은 그것이 관객을 단순히 수동적인 관람자로 내버려두지 않으려 했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다양한 방식과 장치, 연출전략을 통해 연행자와 관객이 함께 신체적으로 현존함으로써만 생겨날 수 있는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실험하였다. 관객을 퍼포먼스의 주체적인 요소로 도입함으로써 연출자의 의도와 계획이 실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 하지만 오늘날의 퍼포먼스는 이러한 성격을 크게 상실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오늘날의 매체적 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에리카 피셔 리히테가 물질성 Materialität"라고 칭하는 것, 의미보다 먼저 우리 신체를 엄습하는 것. 오늘날 세계의 사건과 사물들을 매체를 통해 접하는 우리에게는, 그 사건이나 사물들의 물질성과의 신체적, 즉각적 접촉보다 그것의 의미를 떠올리는데 더 익숙하다. 사건이나 사물의 물질성은, 그것이 매체를 통해 재현되는 동안 사라지거나 소멸하고, 우리에게는 그것의 의미론적 껍질만이 전달된다. 우리는 사건이나 사물의 물질성에 반응하기 보다는, 그것의 의미를 떠올리고 해석하는 구경꾼이 되고자 한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마치 우리가 원하는 대로 골라서 감상할 수 있는 영화나 드라마처럼,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향유를 제공해주는 대상으로 마주하고 싶어 한다.

- 오늘날의 퍼포먼스에서는 무엇보다 에리카 피셔 리히테가 강조하는 “autopoetische Feedback 연관이 사라졌다. 퍼포먼스는 그것이 매체를 통해 매개되지 않는다는 사실 말고는 매체 - 영화나 영상 등 -를 통해 전달되는 매개된 사건의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관객은 그것이 영화관이 아니라 미술관에서 벌어진다는 것 말고는 어떤 다른 차이도 없는, 눈 앞에서 벌어지는 퍼포머의 움직임을 감상한다. 관객에게 일시적인 공동체에의 참여가 유도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그 참여에의 유도를 거절할 가능성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관객은 그저 미술관 내 일정한 장소를 점유하고서, 필요하다면 자리를 옮겨가면서 벌어지고 있는 퍼포머의 행위를 감상할 뿐이다.

- 오늘날 가장 많이 생산되는 작품 형태 중 하나인 영상은, 이러한 탈 물질성, 나아가 자기생산적 피드백의 상실을 그 특징으로 한다. 영상을 통해 접하는 매개된사건과 사물, 사람을 우리는 그것의 현존속에서 만나지 않는다. 그들이 지닌 물질성, 영상이라는 매체에 의해 탈각되고, 영상의 의미론적 문법에 의해 가공되어 있다. 우리는 그 물질성에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그를 재현한 작가의 기법이나 나레이션, 설명 등을 통해 그 사건, 사물, 사람에 대한 정보를 받아들인다. (영상매체의 물질성을 가장 잘 구현하는 방식은, 어쩌면 영사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