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 있는 세계

[스크랩] (2011년 12월 27일) 이민해, 딸기 맛이 낳냐. 누룽지 맛이 낳냐?

김남시 2011. 12. 27. 22:44

 

이 소설, 이라 부르기엔 너무 짧고 꽁트라 하기엔 너무 진지한 여섯 페이지 짜리 소설의 저자 이민해는 대학 3년생이다. 이 학생은 번듯한 직장을 위해 필요한 자격증이나 그런 종류의 커리어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당장의 학점 관리에도 심대한 악영향을 끼치는 그는 내 수업에 여러 차례 결석하고, 열정과 문장은 살아있으나 답은 없는 답안지를 제출한 바 있다 교내 자치언론 잡지 만드는 일을 한다. 편집장도, 발행인도 아니면서 그는 에세이, 르포, 인터뷰, 소설 등으로 잡지 분량을 메우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런 잡지에 늘 부족하기 마련인 편집진을 모집하는 광고에 전속모델로 나온다. 그래서 이 잡지 전체에 걸쳐 글과 다채로운 자세로 여러 번 등장하는 이 저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종강하는 날 시험기간에 기막히게 맞추어나온 네 번째 잡지를 머쓱하게 건네주던 그는 역시 이번호에서도 과다 출연 중이었다.

 

이 소설의 기이한 제목은, 내 생각에, 타협의 산물이다. 그것은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의 무게감을 견디지 못하는 쑥쓰러움 혹은 젠체하며 고상하게 말하는 방식에 대한 혐오로부터 비롯되었다. 어쩌면 이 타협은 이 대학생 저자의 내면이 아니라, 학생회관이나 구내 카페 한 구석에 학원 또는 자격증 광고물들과 같이 배치되어 있는 이 무가지 잡지와 이런 잡지를 진지하게 읽을 여유가 없는 대학생 독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 글은, 딸기나 누룽지 따위와는 전혀, ‘낫냐’, ‘나으냐’, ‘낳냐라는 음운적 실험과는 별 관련이 없는, ‘486을 넘어 586을 바라보는운동권 부모의 대학생 자식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저자 자신의 것이냐 아니냐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간고사와 기말 레포트 사이에, 법인화 반대 투쟁과 FTA 날치기 규탄 시위 사이에, 학점과 불확실한 미래 사이에서 쓰여졌을 이 소설이, 지금까지 접하기 힘들었던, 아니 늘 접하고는 있지만 알 수 없었던 이 세대의 내면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목할 만 하다, 고 생각했다. 이런 중요한 주제를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짧고 당황스러운 비약과 불안한 구조를 가진 이 어설픈 소설을, 소개하는 이유다.

 

소설 속 대학생의 아버지는 평일엔 일한다. 일을 해서, 한땐 생활력이 쩔어서 실직한 자기 대신 가장이 되어 IMF를 돌파! 극뽁! 했었지만 지금은 여고 동창들과 산으로 바다로 놀러 다니는 게 일이 된 처와 어느새 일 년에 천 만원씩 꼴아 박으며 공부는 하는지 마는지 아무튼 대학이란 델 다니게 된 자식들을 먹여 살린다.” 그런 아빠는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책을 읽는다. 아무리 세상 살기 힘들어도 역시 희망은 노동운동이라거나, 미국이 어떻게 우리를 집어삼키려는지 알아야 한다고 외치는 책들. 그렇게 평일이 지나고 주말이 되면 광화문으로 시청으로 청계천으로 집회를 쫓아다닌다. 집에선 도통 말을 안 하나 알 길이 없지만, 그대로 우린 다 안다. 이십년 넘게 같이 살았다. 이 정도 눈치 있을 짬밥은 된다. 청계광장에서 신나게 노래 부르다가 아빠를 마주친 적도 있었다. 아빠는, 언제였더라, 아무튼 얼마 전 주말엔 강정마을까지 갔다 오는 파워 열정을 과시했다. 기껏 제주도까지 갔다 오면서 귤 한 알 안 사왔다고 엄마가 삐진 건 안 자랑. 아무튼 내가 어릴 때부터 그랬다.”

 

나로서는, 이 운동권 아빠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무엇인지, 그러면서도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삶이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런 아빠 밑에서 자라 대학생이 된, 그러니까 386 세대의 자식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이다. 운동을 하는 아빠, 그 아빠가 여전히 싸우고 있는, 변하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가끔씩 집에 몰려온 아빠 친구들은 하나같이 낡고 피로한 얼굴을 하고”, “담배를 뻑뻑 피우면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거나, “도깨비같이 벌건 얼굴을 하고” “사나운 노래들을 부르곤 했다. 그의 집 책꽂이에 세계명작동화와 낡은 민중가요 노래집과 신문지로 포장을 싼 8, 90년대 불온서적들이 무심히 꽂혀있었고,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 두 세계는, 역시 서로 어울리지 않는 그의 삶의 내적 분열로 이어졌다. “세계명작 동화를 읽고 자란 나는 공주처럼 예쁜 아이돌 가수가 좋았지만 불온서적을 읽은 나는 그것들을 비난했다. 나는 레이스가 잔뜩 달린 드레스와 살벌한 서체로 적힌 투쟁’, ‘혁명같은 글자들을 다 좋아했다. 도덕적 우월감과 어설픈 정의감은 과감히 명작동화를 쳐냈다. 아니 쳐냈다고 착각한 건가....”

 

이런 분열은 화자의 내부로까지 연장된다. 친구가 입는 청바지가 부러워 아빠에게 사달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사오만원? 지금 굶고 있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돈이면 걔네가 몇 끼를 먹을 수 있는지는 아냐..... 그 기분을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차라리 돈이 없다고, 우리 형편에 그런 건 사치라고 말했더라면 소설은 쓰이지 않고 내 삶은 이렇지 않았을 거다. 누가 그걸 모르냐고, 그래도 갖고 싶은 건 갖고 싶은 거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굶어 죽는 아이들이 그렇게 많은데 청바지 따위를 갖고 싶어하는 스스로가 혐오스럽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도 토할 것 같은 두 가지 생각은 절대 섞이지 못했다. 멀티 태스킹 조기계발의 순간. 덕분에 지금 나는 과제 하면서 티비도 보고 문자도 하고 노래도 들으면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니면 바로 그런 이유로) 그는 의식있는대학생이 되었다. 그런데, 이때의 의식이란 분열에 대한 자의식이다. “대학에 가서 돈을 벌게 되면 절대 과외만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입학하자마자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과외를 시작했다. 통장에는 몇십만 원씩의 돈이 꽂혔다. 이제 그 돈으로 청바지를 사서 입거나 찢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냥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대신 술을 마셨다. 한 손에 소주잔을 들고 수요자도 공급자도 만족하니 사교육은 존나 좋은 거라고 말하며 웃었다....내가 과외를 못 받은 건 집에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교육이 양극화를 부추기는 사회악이기 때문이었다.”

 

결손가정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동시에 빵집, 옷가게, 문서작업, 전단지, 인형 탈을 넘나드는 알바 편력을 갖게 됐다. 알바를 하면서, 편하게 과외만 하는 친구들보다 내가 낫다고 위안했다. 하지만 내가 걔네보다 나은 건 사장이 욕해도 잘 참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 정도다. 자 이제 모든 분열된 나를 만족시켰다. 과외를 하면 술을 실컷 마실 수 있고, 공부방에 가면 과외를 하는 죄책감을 줄일 수 있고, 알바를 하면 우월감이 생긴다. 몇 달 뒤에 쓰러졌다. 지금은 다 그만두고 과외만 한다.”

 

그럼에도 (아니면 바로 그런 이유로) 그는 운동권대학생이 되었다. 아니 적어도 그는 가끔, 아주 가끔은 광화문에 가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기도 한다.” 거기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놀랍게도 그는 싸움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그 싸움은 승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죽지 않기위한 것이다. “많은 깃발과 더 많은 전경들. 혹시 저 헬멧 속에 아는 얼굴이 숨어있진 않을까. 한명씩 살피다 보면 시간이 잘 간다. 주말엔 과외를 하러 가야해서 금방 빠져나온다. 그보다 더 가끔, 광화문에서 과외순이 집까지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눈물을 참는다. 언젠가 그들에게 승리하기 위해 싸웠던 날들이 있었다면 지금 우리에겐 죽지 않기 위해 싸우는 날들이 남았다. 우린 끽해야 죽지 않을 수 있을 뿐이다. 승리는 요원하고, 항상 패배한 채로, 목숨만 간신히 붙어서, 아직도 싸우는 사람들이 있으니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근데 우리가 이렇게 계속해서 살아있다고 해서 언젠가 승리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트레이츠> 4  http://portraits.tistory.com/5  에서 읽을 수 있다.

출처 : 비평고원(Critical Plateaux)
글쓴이 : 김남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