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 있는 세계

소리로 공명되는 대화와 사랑 : 황정은 <백의 그림자>

김남시 2011. 1. 20. 02:24

“네, 네, 네”,

“어, 어”,

“그래, 그래”

 

전화를 받는 사람들이 내 말을 듣기도 전에 거의 자동적으로 이렇게 발화한다. 이 말들 속에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다. 짧은 시간에 많은 일들을 해치워야하기에 그 말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지 않는 그 바쁜 사람들에게 이 말은 그 속에 부재하는 화자를 대신해 상대를 응대하는 친절하지 못한 급사다. 그는 손님과의 용무를 되도록 빨리 해치우기만을 원한다. 이중, 삼중으로 반복된 긍정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아니’, ‘안돼’ 라는 부정보다 이 말들이 더 큰 단절감을 주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해결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려는 이 말들은 자기 속에만 머무르는 화자를 대신해 습관화된 말을 상대편에게 던져놓을 뿐이다. 이러한 대화방식에 익숙해있던 우리에게 <백의 그림자> 등장 인물들의 대화는 처음엔 낯설게 느껴진다.

 

                             “무재씨,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요.

글쎄요.

나가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죽지 않을까요.

죽나요.

어디서든 언젠가는 죽겠지만 나가지 못한다면 나가지 못한채로 죽겠죠.

무서워요.

무서워요?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요.

무서워요?

네.“

 

“무서워요/무서워요?/무섭지 않아요?/무서워요/무서워요?/네.“ 이 대화에서 최초의 ”무서워요“는 두 사람에게서 반복되면서 공유된다. 여기 등장하는 말들은 상대에게 어떤 정보를 전달하고는 제 할일을 다해 버리는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가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유사한 음성을 울려내는 소리에 가깝다. 이 대화에서 일어나는 일은 정보의 교환이 아니다. 거기에서는 내가 낸 어떤 소리를 상대가 듣고 있다가 그와 비슷한 소리를 내고, 그를통해 두 사람의 소리가 맞물려 하나의 소리가 만들어지는 공명이 이루어진다. 그 공명은, 두 사람이 세번씩 상대의 목(몸)소리를 따라하는 이 대화를 읽으며 (속으로) 따라하는 독자에게까지 전해져온다. 서로의 목(몸)소리를 공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대화는 무엇보다 상대가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가능하다. 상대의 소리에 귀를 귀울인다는 것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는 주변 환경의 고요함과 기꺼이 그 소리에 자신을 맡길 수 있는 “바보라고 해도 좋으니 끊지 않는” 조급하지 않은 여유가 필요하다.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를 읽고 내게 오래동안 남았던 것은 이러한 대화의 음성적 이미지였고 나는 이것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해설에서 신형철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조금 이상해 보이는’ 대화를 “독단적인 판단이 없고 그 판단의 강요가 없으며 효율을 위한 과속이 없”는 대신 어떤 윤리적인 ‘거리’가 있는 “윤리적인 무지의 대화”(186쪽)라고 특징지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윤리성이 아니라 그것이 지니는 음성성에 있다. 이 대화가 “속물적인 욕망으로 들끓는 이 세계의 열외에 이런 위로의 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독자를 위로”(187쪽)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들어진, 서로의 음성을 울려 공명하는 대화의 모습을 수행하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년 무재가 살았습니다. 무재의 식구들은 그림 한 점 없는 커다란 방에서 살았습니다. 식구는 아홉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고 누나가 여섯이었습니다.

여섯이나 되나요?

무재가 일곱 번째로 막내입니다.

많군요.

많은가요.

왜 그렇게 많을까요.

그건 말이죠, 하고 무재 씨가 고개를 한쪽으로 약간 기울이고 말했다.

그게 좋았던 것 아닐까요?

그거요?

섹스.

....

이런 이야기는 너무 야한가요.

하나도 야하지 않은데요.

야하지 않을까요.

야해도 좋아요.

야한 게 좋나요.

야해도 좋다고요.“

 

“많군요/많은가요/왜 그렇게 많을까요/그건 말이죠”에서, “너무 야한가요/하나도 야하지 않은데요/야하지 않을까요/야해도 좋아요/야한 게 좋나요/야해도 좋다고요”에서 반복되는 음절의 리듬감은 신기하게도, 그를 읽는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어, 어”, “그래, 그래”에서처럼 외적 긍정의 시그널을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음성의 막막한 단절감과는 달리, 상대에 의해 조금씩 변형되는, 함께 놀이를 하고 있는 듯한 이 열려있는 반복의 리듬감을 속으로 따라하는 우리가 음성을 통해 공명하는 대화의 가능성을 수행적으로 performativ 확인하기 때문이리라. 소설 속의 무재 씨는 정보가 아니라 소리를 교환, 아니 공유하는 이런 대화를 통해 사랑을 고백한다. 서로의 말을 따라, 그 음성적 울림에 자신의 말을 닮게 만드는 미메시스적 대화 속에서 그것은 상처받기를 두려워하는 명령조의 협박도, 치욕스러운 거절을 예상한 에두름도 아니다. 소리를 통해 이미 공명하고 있기에 별도의 목적어를 말할 필요도 없는 “나는 좋아합니다”로도 충분하다.

 

“무재씨, 하고 내가 말했다.

섹스 말인데요, 그게 그렇게 좋을까요.

좋지 않을까요.

좋을까요.

좋으니까 아이를 몇이나 낳는 부부도 있는 거고.

글쎄 좋을지.

궁금해요?

그냥 궁금해서요.

여기서 나가면 해 볼까요.

나갈 수 있을까요.

언제까지고 숲이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나는 좋아하는 사람하고 하고 싶은데요.

좋아하면 되지요.

누구를요.

나를요.

글쎄요.

나는 좋아합니다.

누구를요.

은교 씨를요.

농담하지 마세요.

아니요. 좋아해요. 은교 씨를 좋아합니다.“

 

“그게 그렇게 좋을까요/좋지 않을까요/좋을까요/좋으니까 아이를 몇이나 낳는 부부도 있는거고/글쎄 좋을지”에서 둘이 교대로 따라하면서 공유된 음절들 - ‘조을까’, ‘조치’, ‘조으니’, ‘조을지’ - 은 “나는 좋아하는 사람하고 하고 싶은데요/좋아하면 되지요/누구를요/나를요/글쎄요/나는 좋아합니다/누구를요/은교 씨를요/농담하지 마세요/아니요.좋아해요.은교 씨를 좋아합니다“에서의 ‘조아하는’, ‘조아하면’, ‘조아함니다’, ‘조아해요’의 울림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러하기에 ”은교 씨를 좋아합니라“라는 무재 씨의 고백이란 섹스에 대한 대화를 나눌때 이미 공명했던 음성의 울림을 약간 다르게 변주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들의 대화가 자신의 몸을 울려내는 서로의 몸의 소리를 섞어내는 음성의 공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인 한, 그 울림을 통해 공유된 이들의 사랑은 서로의 몸을 섞는 섹스와 자연스럽게 이어져있다.

 

처음에는, ”새벽에 떠나는데 강아지만 같이 갔다고 하고, 발자국만 남았다고 하“는 노래 구두 발자국은 ”목이메서“ 부르지 못하겠다던 무재 씨가 ”한 번 더, 라고 해도 못 하겠다고는 하지않고 하얀 눈 위에, 라면서 담담하게 노래“하게 된 것은 말과 목소리의 공명으로부터 시작된 이들의 음성성의 필연적 귀결이 아닐까. 소리가 ‘내 몸을 울려서 다른 사람의 몸에 진동을 선물해 주는 것’ * 이라면 먼저 ”노래할까요“라고 말하는 무재는 바로 소리를 통한 사랑을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 이 글의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은 1/n 잡지 2011 Winter 에 실린 보이스 테라피스트 김진영의 인터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