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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23일) 밥벌이의 신성함. 김 훈의 농경적 세계관

김남시 2010. 11. 23. 19:24

김장수는 바다 식품에 게장을 납품하는 하청업체 사장이었다. IMF이후 하청계약이 잘려 그가 운영하던 장수 식품은 문을 닫고, 그는 택시 운전사가 된다. 택시 운전사가 된 왕년의 하청업체 사장 김장수의 삶을, 김훈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준다.

 

„저녁반 택시는 오후 네 시부터 새벽 네 시까지 운행한다. 날마다, 택시의 종착점은 장소가 아니라 시간이다. 골인지점이 없는 장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교대 시간을 향하여 뛰고 또 뛰어서 사납금을 벌고, 사납금 구만 오천원의 고지를 넘어서 다시 뛰고 또 뛰어서 뛴 만큼만 벌어먹고 산다는 일은 잔혹했지만 선명했다.“ (김훈, 배웅, <강산무진>, 문학동네)

 

위 짧은 구절 속에는 „밥벌이의 신성함을 누구보다도 ‚지겹도록’ 맹신하고 있는“ (로쟈의 인문학 산책, 73쪽) 김훈의 삶에 대한 태도가 온전히 드러나 있다. ‚골인지점 없는 장거리 달리기 선수’ 같은 김장수의 삶은 고단함으로 가득 차 있다. 김훈의 언어는 그 고단함을 절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런 삶의 조건에로 그를 내모는 사업주의 부당함을 고발하거나 그런 삶의 조건을 양산시키는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뛰고 또 뛰어서 뛰는 만큼만 벌어먹고 산다는 일은 잔혹“하지만 그것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김훈에게는, 삶의 사회, 정치적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밥을 벌어먹고 사는 일 자체에서 나온다. 밥은, 먹지 않으면 죽는, 무조건 먹어야 하는 것이다.

 

„밥은 끼니때마다 온 식구들이 둘러앉아 함께 먹는 것이다. 밥이란 쌀을 삶은 것인데, 그 의미내용은 심오하다. 그것은 공맹노장보다 심오하다. 밥에 비할진대, 유물론이나 유심론은 코흘리개의 장난만도 못한 짓거리다….밥은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윤기 흐르는 낱알들이 입 속에서 개별적으로 씹히면서도 전체로서의 조화를 이룬다. 이게 목구멍을 넘어갈 때 느껴지는 그 비릿하고도 매끄러운 촉감, 이것이 바로 삶인 것이다. 이것이 인륜의 기초이며 사유의 토대인 것이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15쪽)

 

„밥의 생물학적 본질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것은 무조건 먹어야 하는 것이며 안 먹으면 죽는 것이다.“ (위의 책 31쪽)

 

먹지 않으면 죽는, 그래서 무조건 먹어야 하는 밥,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치욕일 수 없다. 배가 고파 미군 쓰레기통 속 먹다 버린 닭다리로 UN 죽을 끓여 먹는 것도, 부도가 하청업체 사장이 택시 운전을 하는 것도, 전쟁에 패한 일국의 국왕이 적장 앞에 무릎을 꿇는 것도 치욕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김훈에게 그것은 밥을 위한, 밥을 먹지 않으면 죽는 ‘생물학적 본질’을 지닌 우리에게 주어진 필연적인 삶의 분투에 속한다. „모든 먹거리가 반드시 돈을 경유하게 되어 있“(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14쪽)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이 밥의 정언명령은 ‘기어코 돈을 벌어야’ 하는 ‘밥벌이의 지엄함’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밥벌이를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하는 잔혹하고, 힘겹고, 치욕적인 일들 모두를 그 엄혹한 필연성 속에서 ‘선명’하게 만들어준다. 밥벌이는 지겹고 잔혹하지만, 거기에는 ‘아무 대책도 없다’. 우린 그저 ‘꾸역꾸역 밥을 벌어야’ 한다.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이,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 달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를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휴대전화를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 꾸역 밥을 벌자“ (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모든 먹거리가 반드시 돈을 경유하게 되’있음에도,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밥벌이란 결국 ‘돈벌이’에 다름 아님에도 김훈이 그걸 ‘꾸역꾸역’ ‘밥’ 벌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돈벌이의 필연성을 곧바로 밥의 신성함으로부터 도출해내려는 김훈이 애써 보지 않으려는 것이 바로 그 ‘밥’과 ‘돈’의 차이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김훈이 말하듯 밥이란 ‘쌀을 삶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조건 먹어야 하고 먹지 않으면 죽는 ‘생물학적 본질’을 갖는다. 그에 반해 돈은 밥처럼 삶아 목구멍으로 삼킬 수 없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한 사회 속에서만 밥으로 교환될 수 있는 ‘사회적 본질’을 갖는다. 그러한 한 ‘돈’ 벌이에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 돈의 교환을 매개하는 사회가 끼어든다. 그 사회가, 노동시장이 얼마의 돈을 얼마만큼의 밥과 교환해줄지, 얼마의 노동을 얼마만큼의 돈과 교환해 줄지, 아니 그런 돈벌이의 기회 자체를 제공해줄지를 결정한다. 그렇기에 돈벌이에는 사회적 갈등과 대립, 불평등이나 억압이라는 단어들이 끼어든다.

 

그에 반해 김훈의 ‘밥’ 벌이에는 그런 사회적 관계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밥벌이는 고독한 개인이 자연화 된 세상과 맺는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거기에는 사회적 갈등이나 대립, 불평등이나 억압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김훈이 말하는 밥벌이는 노동을 통해 땅에서 나오는 수확물로 살아가는 농업적 삶의 방식에 기초해있다. 거기에서 개인은 고독하게 세상하고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연으로서의 세상과만 맞서있다. 밥벌이는 지겹고, 힘겹지만 그 힘겨움은 땀을 흘려 땅을 갈고, 씨를 뿌리며 밭을 일구는 정직한 노동의 힘겨움에 다름 아니다. 그가 더 열심히 땀을 흘리면, 그는 그만큼 더 많이 수확할 것이다. 택시 운전사가 된 김장수가 „골인지점이 없는 장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교대 시간을 향하여 뛰고 또 뛰어서 사납금을 벌고, 사납금 구만 오천원의 고지를 넘어서 다시 뛰고 또 뛰“기에 그는 바로 그렇게 ”뛴 만큼만 벌어먹고“ 산다. 이렇게 ”벌어먹고 산다는 일은 잔혹“하지만 ”선명“하다.

 

하지만, 노동을 통해 자연으로부터 먹거리를 수확하는 대신 물건을 팔아 돈을 벌어야 하는 상업적 삶에서만 하더라도 벌어먹고 산다는 일은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거기에는 같은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시장과 유통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경쟁과 대립 관계가 생겨난다. 막강한 조직을 가진 대형마트가 동네 슈퍼들을 망하게 만들어 버리는 일은, 그래도 꾸역 꾸역, 치욕을 감내해가며 밥을 버는 노동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온갖 모욕과 치욕을 감내해가며 일했던 외국인 노동자의 월급을 떼먹는 사장의 문제는, 돌림병 때문에 말라죽은 배추밭의 문제와는 다르다. 김훈의 농업적 밥벌이 론은 그 모든 걸 ‘자연사적’ 문제로 만들고, 그를 통해 그가 묘사하는 삶은 심미적 아우라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