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 있는 세계

지오르지오 아감벤, 호모 사케르 II.2. 지배와 광휘. 경제와 정부의 신학적 계보학을 위하여.

김남시 2010. 9. 4. 09:39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씨리즈 중 II.2 "지배와 광휘"가 독일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난 아직 이 책을 주문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경제적 사정이 날 가로막는다!) 그런데, FAZ에 이 책에 대한 서평이 실렸다. 서평을 쓴 이는
한병철 선생이다.  지난번 한국에 왔을때 한 선생은 내게 아감벤에 대한 책을 준비 중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그 일환으로 계속 아감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내가 읽은 건 이 책이 아니라 이 책에 대한 한병철 선생의 서평이다.
 
 
아감벤을 읽는 한 병철 선생의 '비판적인' 관점은 현재 내가 번역하고 있는, 아니 번역해야 하는 그의
한 선생의 책 "권력이란 무엇인가 Was ist Macht?"에서 제기된 것이다. (며칠 전 FAZ에 실린 이 서평이 아직
그 번역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있는 한국에 있는 나에게는 먼 거리를 에둘러 돌아온 압력으로 느껴졌던 건
이 때문일 것이다. )
 
한 선생은 내게 보낸 자신의 책 한국어 서문 - 수정,보완될 것을 전제하고 - 에서 권력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아래와 같이  피력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권력이 매우 부정적인 어감을 갖게 된 것은 한국의 특수한 역사에서 기인할 것이다. 폭력적인 식민지 지배와 뒤를 이은 수십년 간의 독재의 역사는 권력을 대하는데 그 흔적을 남겼다. 그래서 권력은 억압이자 부자유로 그에 맞서 싸워야 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권력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인식이 권력의 긍정적인 표현 형태들을 덮어 가리고 있다. 권력 개념을 협소화시키고 그를 일방적으로 불신하는 경향에 반대해 이 책은 억압과 자의를 훨씬 넘어서는 권력 발휘 내부에서의 다양한 구분과 차이들을 묘사하려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이 보여주려는 것은 권력이 폭력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권력은 자신에 대한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항은 이미 그 권력이 약화되는 순간 일어난다. 무자비한 폭력을 필요로 하는 권력자의 권력기반은 이미 허약해져 있는 것이다. 그에반해 강력한 권력은 그를 펼치기 위해 폭력에 의존하지 않는다. 폭력과 혼란은 그러한 포괄적인 권력이 부재하는 곳에서, 권력의 담지자여야 할 정치적 혹은 사회적 심급과 기관들이 붕괴하는 곳에서 확산되는 것이다. 긍정적 형태로써의 권력은 형성하고, 생겨나게 하고 정돈하는 gestaltend, hervorbringend und ordnend 것이다. 권력은 폭력과는 반대로 생산적이다. 권력은 그를통해 혼란이 생겨나는 것을 막는다.

 

오늘날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면서 권력은 급속하게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권력은 더 이상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을 지배하는 매체가 아니다. 적어도 서구 사회에서 정치가는 더 이상 고전적 의미에서의 권력자가 아니다. 오늘날 그 정치가들은 권력보다 더 많은 강제와 의존성을 갖는다. 그들이 스스로 행동하고 결정할 가능성들은 크게 제한되어있다. 무제한적인 권력이 원리적으로 권력자에게 무한한 결정과 형성 가능성을 열어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대 경제 기업들 내부 커뮤니케이션도 권력에 의해 규정되는 조직에 전형적인 엄격한 위계적 구조를 가지지 않는다. 그 곳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은 일방적이고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지는 unidirektionale 영향 행사 모델과는 점점 더 단절하고 있다. 오늘날 현대적 기업 커뮤니케이션에서 상급자는 하급자 스스로가 더 많은 영향을 행사할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상호적 영향 행사 혹은 상호 의존성이 더 이상 권력적 machtmässige 이지 않은 커뮤니케이션 모델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권력 커뮤니케이션이 가질 수 없는 긍정적 힘들이 자라나올 수 있다.

 

힐러리 클린턴이 말한 "smart power" (지성적 권력)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다른 사람들의 욕구와 요구들에 응답하는 권력이다. 하지만 이는 오늘날의 세계질서가 부시가 추구했던 권력 정책 Machtpolitik을 더 이상 가능케하지 않는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권력은 근본적으로 독백적 monologisch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권력이 갖는 결정적 약점이 존재한다. 권력자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는 대화를 하려하지 않는다. 권력에 종속되어 있는자들 만이, 곧 복속되어 있는 자들 Hörigen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다 Hörend.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는 급속하게 권력의 시대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권력의 광채는 권력이 단 하나의 목소리에 절대적 타당성을 부여한다는데 있다. 그런데 우리 시대는 다수의 목소리들의 시대다. 하지만 묶여지거나 매개중재되지 않으면 다수의 목소리는 웅성거림 Stimmengewirr만을 낳으며 그것은 폭력의 장소가 될 수도 있다. 권력의 악마성 Diabolie은 자기 목소리를 위해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억압한다는데 있다. 하지만 권력의 긍정적인 힘은 권력이 통솔하는 목소리를 통해 웅성거림을 밝힌다 lichtet는 데서 나온다. 권력은 저 수많은 목소리들이 불협화음으로 이어져 행위와 결정을 마비시키지 않게 하는 것이다.

 

아마도 권력의 시대는 지나갔을 것이다. 권력이라는 하나의 목소리는 다수의 목소리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는 더 이상 권력을 통해 걸러지지 않는 모호한 영향력들과 복잡한 상호 작용들의 시대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역사적 상황이 권력의 다양한 표현형태들을 다시 상기할 필연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건 권력의 쇠퇴 Entmachtung로 부터 초래될 문제들을 우리가 겪지 않게하기 위한 것이다.

 

위 글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 그리고 지난 번의 다른 곳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한병철 선생은 권력이 갖는 생산적 차원, 무엇인가를 생성시키고, 조직하고, 살아가게 하는 권력의 긍정적 positive 한 측면을 드러내 보여주려고 한다. 그를통해 권력을 극복하고, 그로부터 벗어나고, 물리쳐야 하는 '타자적 의지'로 이해하는 권력에 대한 부정적 negative 관점 대신, 실제로 작동하는 권력에 더 깊이 다가가고자 한다.

 

아감벤의 책에 대한 한 선생의 비판 지점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가 보기에 아감벤은, 칼 슈미트의 의지주의적 정치론에 입각해, 권력을 주권자의 의지적, 결단적 행위에 두고 있다. 그로인해 아감벤에게서 권력은 '권력경제적 요소들'로만 채워져있다. 거기에는 그 권력 안에서, 권력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정치의 영역에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은 

주권자의 의지에 '저항하는 의지'를 맞세워서 투쟁하고, 그 의지를 밀어냄으로써 우리 의지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방법밖에는 없다. 만일 아감벤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면 이러한 철학적 기반을 갖는 권력론에게 '정치'에 대한 시민적 참여의 문제는 주권적 권력에 대한 저항, 투쟁이라는 방식으로만 가능 할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정치는

저 대립적 의지들이 투쟁하고, 각축을 벌이는 장으로,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자, 우리의 살아감의 장으로부터 

적어도 심정적으로, 환멸적으로 분리되어 버릴 것이다. 

 

아감벤에게, 권력의 의지에 대한 의지의 권력으로서의 투쟁과 저항말고, 정치의 가능성은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으로서 가능할까? 아감벤을 더 공부해보고, 고민해 보아야 할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