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철학자와 대학교수

김남시 2009. 9. 9. 18:05

  

1963 8 27 귄터 안더스는 당시 프랑크푸르트 대학 교수였던 아도르노에게 편지를 보낸다. 편지엔 유대인 철학자들의 오래된, 그리 원할하지만은 못했던 과거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귄터 안더스가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음악을 테마로 하는 교수자격 논문을 쓰려했을 아도르노는 이를 거절했었다 -, 나찌를 피해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에 드러나던 지식인 사이의 사회적, 경제적 차이 아도르노는 미국에서도 사회 연구소를 운영하며 학자 생활을 계속했고, 철학박사 안더스는 헐리우드 소품실에서 생계비를 벌어야 했다 부터 기인한 위화감 등이 숨기지 않고 드러나 있다.

 

무엇보다 안더스는 사회 비판적인 철학자이면서도 대학 교수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 아도르노의 이중적 실존 Doppelexistenz’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다.

 

안더스는 한편으로는 철학 저자로써 가장 분명한 의미에서 아방가르디스트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쓰는 글을 통해 경고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존중 받기 위해 공공 직책을 맡는 다는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지 저는 이해할 없습니다“ (Adorno, Eine Bildmonographie, S.276) 라며 포문을 연다. „자신의 지위를 통해 스스로 자신의 손을 묶는아도르노의 이러한 이중적 실존 결국엔 어떤 방식으로든 모순을 표출할 밖에 없으며, 그것이 공식적으로는 허락받은 근본성의 교황으로 인정받고 있으면서도 당시의 중요한 시국 사태에 대해 침묵하는 당신의 모습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체 조망을 갖지 못하는 독자들을 끌어들여 미로에 갇히게 만드는당신 글의 문학적 새디즘 형태에서 드러나고 있다고 비판한다. 독자들이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문장을 구사하는 아도르노의 글쓰기 방식은, 안더스에겐, „실지로는 정치적 반대파의 행동을 같이 하지 못하면서 언어적 수단을 통해 무언가 행동하고 있다는인상을 불러내기 위한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한 철학자라면 교수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예를들어 쇼펜하우어가 당시 나가던 철학교수 헤겔을 깜짝 놀랄만한 독설과 더불어 비난하며 설파했던 논지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진정한 철학은 진리에 대한 추구라는, 그가 형이상학적이라 부르는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데, 대학에 자리를 잡고있는 철학 교수는 다만 지역 종교의 가르침, 정권의 의도, 그리고 시대를 지배하는 관점들과 어긋나지 않으려는것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 과거의 소피스트들처럼 철학을 먹고 사는 결합시킴으로써, 교수로서의 철학자는 본성상 배타적이어야 철학을 타락시키고, 옮음과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게 , 결국엔 시대의 정신을 타락하게 하는데 일조한다는 것이다. (Arthur Schopenhauer, Parerga und Paralipomena I. Ueber die Universitäts-Philosophie)        

 

아도르노에 대한 귄터 안더스의 비판은 쇼펜하우어의 이런 논지를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 이에 대한 아도르노의 답장은 본성상 비판적이어야  철학자 인문학자와 대학이라는 제도 사이의 오래된 긴장감을 드러내주고 있다. ‚비판적 철학자이면서도 대학교수라는 지위를 갖고 있는 이유에 대해 아도르노는 첫째, 그것이 물질적 독립성을 가져다 줌으로써 의존적이지 않게 작업할 있는 가능성을 주고, 둘째, 규제와 검열로부터 보호막을 제공하며, 세째, „재능있고 똑똑한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영향을 끼칠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도르노는 안더스를 향해 „ ….이런 기회가 당신에게 주어졌었다면, 당신은 거절하셨겠습니까?“ (Adorno, Eine Bildmonographie, Hg. von T. W. Adorno Archiv, S.281)라고 되묻는다.   

 

아도르노의 마지막 되물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더우기 언제 해고 통보를 받을지, 다음 학기에도 강의를 위촉 받을지 수없는 불안을 가래처럼 꿀꺽 삼키고, 약장수처럼 대학들을 돌아다니는 비정규직 시간 강사들에게는 더욱이. 하지만 심각한 것은 심대한 구조 조정과 경쟁 속에서, 그나마 정치적 자율성도 주장하고 있지 못한 한국의 대학들이 교수들에게 조차, 아도르노가 언급했던 첫째와 두번째의 조건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며, 나아가 결국엔 세번째 가능성도 뺏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100여년전에 쇼펜하우어가, 50여년전에 귄터 안더스가 제기했던, 철학자와 대학교수와의 긴장 관계에 대해 이제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