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세종시와 현전의 커뮤니케이션

김남시 2009. 11. 17. 21:32

세종시를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다. 현 정권은,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은 전임 정권에서 결정된 세종시를,

이명박 대통령도 후보시절 그 실현을 약속했던 세종시를, 이제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어한다.

세종시에 대한 반대 논리 중에서 눈에 뜨이는 것은 그로인해 발생하게 될 '행정 비효율'을 지적하는 논리다.

 

오늘 (11월 17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기사를 인용하자면,

 

"총리실은 정부 부처 분리로 인한 행정 비효율 문제도 제시했다. 그 예로 과천에 있는  C 부처 장관을 들었다.

 이 장관은 올 상반기 25주 중 12주는 주중 3일 이상 서울로 출장을 갔다. 정부 회의와 국회 때문이었다.

 대전의 D 청 청장도 18주는 국회와 차관회의 등으로 주 3일 이상 서울과 과천에 출장간 것으로 집계됐다.

 한나라당 심재철, 임동규 의원은 16일 승용차를 타고 국회를 출발, 세종시를 다녀오는 '실험'을 벌였다.

 심의원은 "세종시에서 서울에 왔다 가려면 하루 4-5시간은 차 안에서 보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 회의나 국회 등에 참석하느라 장관, 청장 등의 정치가들이 하루 4-5시간을 차안에서 보내야 한다면, 

 그야말로 이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불필요하게 낭비하는 비효율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게 들었던 의문은 그렇다면 왜 정치가들은 그러한 비효율과 시간 낭비에도 불구하고

 굳이 '직접 다 그 자리에 모이는' 방식으로 여전히 회의를 하려고 하는가였다. 

 

 전화가 내가 직접 상대를 만나지 않고서도 그와의 구술적 의견교환을 가능하게 해주는 매체로 등장한지 이미 100년이

 훨씬 넘었다. 오래 걸리던 편지대신 이 메일은 단 몇초만에 나와 상대 사이의 문자적 소통이 이루어지게 해 준다.

 나아가 해외에 파견되어 있어서 회의에 함께 참석하지 못하는 직원들과도 회의를 가능하케 해준 소위 '화상회의'기술은

 이미 많은 기업들에서 활용되고 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커뮤니케이션 테크닉은 이전이라면 내 육체와 상대방의 육체가 공동의 시간과 장소에서 함께 현존하기를 요구하는 대면 커뮤니케이션을 대신해, 서로의 육체적 현전을 필요로하지 않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직접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었어야 할 많은 시간과 에너지 소모를 축소시켰다.

 

현재 한국의 많은 대학들에서는, 정해진 시간에 공동의 강의실에 육체적으로 나타나기를 요구하는 - 출석! - 전통적인 강의 대신에, 인터넷을 통해 원하는 시간에 강의를 듣고도 학점을 이수할 수 있게 하는 많은 싸이버 강의들도 제공하고 있다. 한 학기 분의 지식의 전달을 위해서 이제는 강사와 학생이 직접 접하고 만나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이미 활용되고 있는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테크닉의 가능성은 하지만 아직 정치의 분야에서는 그만큼 진출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얼마전부터 국회의원들의 책상엔 필기구와 메모지 대신, 노트북이 놓이고 대통령도 

 컴퓨터 화면을 통해 보고를 받는 등의 외관상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떤 정치적 결정을 위해서는 아직까지도 전통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 곧 해당되는 정치가가 직접 그 자리에 육체적으로 현전하기를 요구하는 방식이 관철되고 있다는 것은 기이한 사실이다. 왜 과천에 있는 장관, 대전에 있는 청장은 정부회의 등을 위해 굳이 서울까지 출장을 갔어야 했을까? 그런 '출장'을 위해 소비되는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하면서 이메일 혹은 메신저, 그도 아니라면 어떤 또다른 커뮤니케이션 테크닉을 통해 정치적 결정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IT 강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정치적 결정 과정이 오래된 전통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쫓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문자'라는 커뮤니케이션 매체에 대해, 말과는 달리 문자는 말할 사람과 말하지 않을 사람을 선택하지도,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감성적 분할>에서 랑시에르에 의하면  플라톤이 이렇게 문자를 비판하게 된 것은, 그가 말하는 육체가 갖는 권위와 그에 대한 가깝고 멂에 의거해 이루어지는 위계적 감성의 분할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자가 전달해야 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전달하고 유통시킴으로써 '말들의 과잉'과 담론의 과잉을 만들어내고, 그를통해 소통을 평등화, 나아가 민주화시키는데 기여한다면, 플라톤이 대변하는 "현전의 패러다임" 은 말하는 육체의 현전을 통해 보장되는,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의 위계적 질서를 옹호한다.

 

정치적 결정 과정에 정치가가 직접, 육체적으로 현전할 것을 요구하는 문화는, 현존하는 정치적 위계질서가 그곳에 참여한 장관과 청장, 그들의 비서와 수행원, 국회의원과 행정직원들 사이의 가시적 위계질서를 통해 늘 재확인되고, 재생산되게 한다. 육체적 현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다른 커뮤니케이션 테크닉은 이러한 정치적 위계 질서를 흔들리게 할 수도 있다. "행정 비효율"이라는 말로 세종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결국엔 이러한 '정치적 위계질서'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