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2009년 9월 23일) 소비자와 노동자

김남시 2009. 9. 23. 09:04

다른 나라와 비교해 한국은 살기좋은 나라라고들 말한다. 그건 유럽에서는 저녁 8시면 웬만한 슈퍼와 가게들이 문을 닫고, 주말엔 아예 열지도 않는 것에 비해 한국에서는 평일에도 훨씬 늦게 까지 물건을 있으며, 주말에도 쇼핑이 가능하다는 ,  24시간 편의점은 말그대로 언제라도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할 있게 배려해 주며, 밤에 배가 고플땐 언제라도 야식을 시켜 먹을 있고, 경쟁적인 서비스 산업으로 인해 자동차가 고장나면 언제, 어디라도 달려와 수리와 일을 맡아주는 보험 써비스가 있으며, 심지어 관공서들도 이제는 늦은 시간까지, 나아가 휴일에 까지 처리할 있는 민원 써비스를 제공하고, 그러한 고객 써비스를 담당하는 직원들 역시, 퇴근 시간이라는 이유로 우릴 돌려보내는 불친절한 유럽 관공서, 기업들의 직원에 비하면 너무나도 친절히 우리의 용무를 돌보아주며, 거의 24시간 동안 풀로 가동되는 서울 시내의 술집, 심야택시, 나아가 대리 운전 시스템에 의해 우리는 귀가할 걱정없이도 친구/동료들과의 술자리를 즐길 있다는 이유 등에서다.

 

과연! 퇴근 시간만 되면 철저하게 문을 닫아거는 가게들, 주말이면 어김없이 폐장하는 슈퍼마켓, 크리스마스나 연말 등의 시즌이면 불러도 오려고 하지 않는 택시, 12 부근이 되면 술을 마시다가도 귀가를 종용하는 술집들, 퇴근 시간이 20 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늘 핸드폰 개통을 없다는 유럽의 -써비스를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한국 사회가 제공하는 경이로운 가능성들은 마치 천국에라도 같은 느낌을 갖게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즐기는 이런 풍요로움들은 우리가 소비자로서 존재하는 주어지는 향유다. 소비자이지만, 또한 소비의 물적 근거를 위해서라도 일을 해야하는 노동자로서의 우리의 실존에로 눈을 돌린다면 우리가 즐기는 이런 써비스 천국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건 우리가 공식적인 퇴근 시간은 있지만 제대로 퇴근하지 못한다는 것을, 주말을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휴식을 취하기 보다는 출근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평일, 나아가 휴일에도 24시간 동안 손님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문을 열고 기다리고, „고객과의 약속 위해 잠도 안자고출동을 위해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언제라도 피로에서 나온 실수와 불친절을 지적/신고/제기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나의 일자리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있는 손님들의 눈치를 보며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노동조건들이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하지 않는다는 분명해 보인다.  

 

소비자인 우리에게 제공되는 풍요로운 향유 노동자인 우리가 감수해야 하는 열악한 노동 조건. 둘이 충돌하거나,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지탱하면서 유지, 재생산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소비자이면서도 노동자인 우리 자신이 소비자로서 향유하면서 노동자로서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비자로서의 향유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노동자로서의 우리 삶의 조건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인 우리가 소비자로서의 향유를 위해 이런 노동조건을 기꺼이 감수하고 받아들이려는 한다면 지금의 상황은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풍요로운 소비를 향유할 우리는 그를 가능하게 하는 노동자로서의 우리의 실존에 대해 잠시 잊고, 노동자로서 힘겹고 불안하게 노동을 하면서 우리는 그를통해 구입된 소비의 향유를 꿈꾼다. 현재의 소비/노동 체제는 향유하는 소비자로서의 우리 자신에 대한 의식을, 노동자로서의 자기 의식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분리시킴으로써 유지되는 것이다. 

 

<트랜스 크리틱>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내가 보기에 바로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고진이 정당하게 지적하듯, 자본의 운동에 우리가 개입해 대항할 있는 지점은 노동력 판매 소비라는 지점이다

 

자본의 운동 G-W-G’ 에서 자본이 만나는 개의 위기적 계기가 존재한다. 그것은 노동력 상품을 사는 것과 노동자(소비자)에게 생산물을 사게 하는 일이다. 만약 중에서 가지만이라도 실패한다면 자본은 잉여가치를 획득할 없는, 다시말해 자본일 없다. 노동자는 위치에서 자본에 대항할 있다.“ (트랜스크리틱, 60)

 

노동자가 노동력을 파는 것을 거부한다면 자본은 생산을 하지 못할 것이며, 자본 순환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생산된 생산물의 구입을 소비자가 거부한다면 자본은 커다란 타격을 입게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노동 거부와 소비 거부는 노동자이자 소비자인 우리가 자본에 대항할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이전까지의 노동/사회 운동이 노동자를 오직 노동만 하는 자로, 소비자를 노동자와는 무관한 유산 계급적 주체들이라고 구분해왔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노동자와 소비자의 관점을 결합/통합시킴으로써 현재의 소비/노동체제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를위해 필요한 것은 향유하는 소비자이자 동시에 노동하는 노동자인 우리의 분열을 노동자=소비자 통일 시켜 내는 것이다. 대안으로써 고진은 책에서 생산-소비 협동조합운동을 제안한다.

 

노동자=소비자에게 일하지 않는 사지 않는 동시에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서 있게 하는 대체 기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생산-소비 협동조합이다.“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60)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New Associationist Movement 결국엔 실패하고 말았다(소조, 사상의 실패 또는 사상의 발생. 가라타니 고진의경우 참조)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그랬을까? 그건 우리의 노동자적 실존을 망각하게 하는 소비의 넘쳐나는 풍요로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소비의 화려한 가시성 아래 감추어져있는 노동의 비가시성 때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