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인간

"지구를 지켜라"와 "밀양"

김남시 2009. 6. 28. 20:30

다른 사람들과 때를 맞추어 보지 못했던, 한국 영화 두 편을 보았다.

 

<지구를 지켜라> 보았다. 사회적 문제 가난한 노동자 가족, 악덕 기업주, 구사대를 통한 파업진압 등등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도입된 망상증적 인물 망상은 분열증적 외관은 갖추고 있지만, 진정성을 결하고 있고,  모든 가족사적 불행의 원흉이자 장본인이었던 거대 화학기업 사장이, 정말로 망상증 인물이 망상적으로 고안해내고, 믿었던 것처럼 외계인이었다는 설정은, 주인공의 불행한 가족사가 지닌 사회적, 구조적 문제들을 기묘한 방식으로 덮고, 치환시킨다. 그를통해 영화는 이유없이 가두어놓은 인간들을 르쌍띠망적 놀음의 대상으로 제공한다는 플롯의 타란 티노의 <호스텔>, 그런 가해자 가족사적 불행을 보여줌으로써 과대 망상적 가해자를 사회적, 구조적 피해자 전환시키는 어설픈 휴머니즘과 버무려 놓았다. 주인공의 개인적 가족사 광부였던 아버지가 사고로 팔이 잘리고, 자살하게 되고, 그의 애인은 파업농성 구사대에게 폭행당해서 사망하며, 그의 어머니는 화학공장에서 일한 후유증으로 회복할 없는 식물인간 상태에 빠지게 되는 그의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잔인한 행동까지도 서슴치않게하는 분열증과 설득력 있게 결합되지 못하고, 양념처럼, 의무로 가슴에 달고있는 김일성 배지처럼, 들어가있다. 평상시의 사회적 행동 과세와 방종, 여자 연예인과의 바람 등에도 불구하고 구속되지 않는 과는 어울리지 않게 놀라운 기억력과 관철력, 게다가 헐리우드 영화에서나 볼수있는 초인적인 의지와 결단력의 인물로 그려지는 화학기업 사장의 캐릭터 역시 서로 어울리지 않는 조각들로 어설프게 맞붙어있고,  경찰 조직 내에서 권력을 둘러싼 부정의한 갈등으로 식당의 한직으로 쫓겨난 최형사의 이야기 역시, 그를통해 비판하고자 하는 혹은 아이러니화시키려는 주제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어떤 장식처럼 붙어있다.  

 

<밀양> 구원 관한 영화다. 과연 신은 인간을 구원할 있을까, ‚할수 있음 kann’ 의미가 아니라 해도되는가darf’ 의미에서의 구원’. 신은 누군가에게 악한 짓을 행한 인간을, 누군가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긴 사람을, 자기 임의대로 용서하고, 그의 영혼을 구원해도 되는가라는 신학적 질문을 영화는 던진다. 모든 죄진 자들을 사해주는신은, 그러나 그들의 죄로 인해 고통받고,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고통을 사해주지는 못한다. 아니, 오히려 신은 자신이 남용하는, 죄지은 자들에 대한 그의 구원 용서 통해서, 그들의 죄로인해 꺽꺽거리며 허리가 굽어지도록 통곡하는 피해자의 고통을 증폭시킨다. 이렇게 함부로 용서하는 신은, 또한 실제 피해를 입은 사람의 고통과는 무관하게 임의대로 처벌을 내리는 현대의 사법 제도와도 맞닿아있다. 자식을, 아내를 죽인 범인을 정작 그로인해 피해를 입은 부모와 남편의 고통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형법이라는 공평한 하지만 무감한 indifferent’ 채찍으로 처벌하는, 그래서 그런 공공화된, 공식적인 처벌의 권위에 자신이 겪는 사적인 고통과 분노를 종속시켜야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이제 법을 뛰어넘어 사적으로 복수하는 일련의 영화들과 같은 계열에 영화 <밀양> 있다. 이런 사적 Justiz 영화가 경찰은 혹은 검찰은 함부로 처벌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영화 <밀양> 신은 함부로 용서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를통해 영화는 전자의 영화들이 다루고 있는 우리 삶의 상황을 훨씬 극단적으로까지 몰고가 보여준다. 자식을,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범인을 공공적 형법의 손에 넘겨 주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럼에도 그를 거부하고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복수 있는 길이 남아있지만, 자식을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범인에 대한 용서를 신에게 넘겨 주어야 하는 사람에게는 그를 거부할 아무런 현실적 방도도 남아있지 않다. 함부로 용서하는 신에게 용서할 기회를 빼앗겨 버린 사람은, 그가 삶의 근기를 잃지 않으려면, 오만한 신을 향해 항의하고, 그를 저주하는 밖에는 없다. 타인에 대한 복수가 최소한 살아있는, 손으로 붙잡을 있는 복수의 상대자를 가지고 있다면, 신에 대한 항의와 저주는 그렇지 못하다. 그건 신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항의와 저주의 모습을 띌수 밖에 없고, 그를통해 사람들이 이런 초월적 항의/저주의 무고한 피해자가 된다. 그래서, 설교를 하던 목사는 당혹해하고, 약국집 장로는 그의 아내에게 말할 없는 가책하나를 안게되고, 기도회가 열리던 집의 유리창엔 구멍이 뚫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