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인간

[스크랩] Re:시인과 총장-황지우를 기억하며

김남시 2009. 6. 7. 14:23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시인, 총장 말고도 조각가로서의 황지우가 있었다는 사실을 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어제 님의 글을 읽고난 후 예전에 모아두었던 책들을 정리하면서 1995년 출판된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라는 학고재 출판사의 책을 발견하지 못했다면요. 황지우가 진흙을 빚어 만든 작품들 사진과 그의 시가 함께 실려있는 그 책의 서문에서 황지우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지요.

 

"90년대에 들어서 근래 몇 년 동안 나는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라기 보다는 도무지 글이 씌어지지가 않았다. 노름판에서 밑천까지 다 날려버린 새벽처럼 스스로 인전하기에는 약오르는, 좀 쑥스러운 박탈감이랄까, 생을 몽땅 '탕진' 해버린 것 같은 고갈의 느낌이 나를 결박하고 있었다....나는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소파에 푹 파묻힌 채 멍하게 실내를 응시하면서 시간이 지겹도록 느린 간격으로 내 곁을 경과하게 했다.... 그리고 15층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멍하게 외부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나는, 이건 좀 끔직하다, 고 느꼈다.

 

... 나는 빛이 희뿌염하게 새어 나오는 저 바깥을 향해, 벌레처럼, 더듬거렸다. 의식이 거의 퇴화하자 촉각만이 남았고, 뜻밖에도 그 촉각은 나에게 시원의 감각을 열어주었으며, 그때 내 손끝에 물컹하게 잡혀 있는 것이 진흙이었던 것이다. 진흙은 똥 다음으로 더럽다. 그러나 질컥거리는 그것의 촉감은 그 어떤 살보다 더 에로틱하다. 내 두 손에서 일어나는 촉감의 쾌감, 그것의 전율케하는 직접성은 내 속의 무엇인가를 스파크시켰다. 촉각이 영혼을 發電시킨다는 것을 그때 나는 알았다. 나는 만졌다. 나는 깨어났다."

 

이제 총장 직을 사퇴하게 된 황지우에겐 90년대 보다 어쩌면 더 치명적인 '고갈의 느낌'이 찾아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촉각'이 그때처럼 그를 다시 "깨어나게" 할 수 있을지, '똥 다음으로 더러운" 진흙에 다시 손을 뻗을 만큼 그에게 어떤 "생에의 덧없는 의지"가 발휘될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출처 : 비평고원(Critical Plateaux)
글쓴이 : 김남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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