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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 '비극적인 것'에 대하여

김남시 2008. 7. 15. 16:53

1.

 

키에르케고르는 근대 사회에서 개인이 가족, 국가, 혈족 혹은 운명 등의 모든 실체적인 규정들로부터 고립 Isolieren 되어 자신 스스로가 자기 자신의 창조자로, 자신의 모든 행위의 자유로운 주체로 스스로를 의식하고 등장하면서 부터 고대 비극에서 찾아볼 있었던 비극적인 das Tragische’ 해소되고 사라져 버린다고 말한다. (Sören Kierkegaard : Der Widerschein des antiken Tragischen in dem modernen Tragischen. In Entweder Oder.) 모든 자기 외적인 규정들로부터 자유로와진, 아니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근대적 주체는 고대 비극에서와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운명적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의 잘못된 행동 혹은 실수로 인해 파멸하며,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고대 비극에서의 비극적 슬픔 Trauer 아니라, 개인의, 결국 그의 잘못된 행위와 선택에서 기인한 몰락을 바라보는 데에서 오는 고통스러움 Schmerz이다. 그건 자기 자신의 창조주이자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맡은 개인의 파멸을 우리는 그의 잘못된 선택 혹은 행동의 결과라는 윤리적 견지에서 바라보게 되며 그에게는 그러한 의미에서의 윤리적 부과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다른 개인의 파멸을 바라볼 때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스스로를 우리의 행위와 선택의 자유로운 주체로 의식하고 있는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과 선택의 결과에 대해 후회의 고통을 겪어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감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누구의 잘못도 아닌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 결과라는 사실,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듯 모든 죄의 철저한 투명성앞에서, 우리의 고통스러움은 더욱 가중된다. 이러한 점에서 후회 Reue 스스로를 자신 운명의 개척자로 정의하는 근대적 주체가 감수해야 하는 가장 쓰디 고통스러움이다.

 

이에 반해 고대 비극의 주인공들에게서 우리가 느끼는 비극적 슬픔 Trauer’ 이러한 고통스러움과는 구별된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의 몰락이 전적으로 그들 개인의 잘못된 선택이나 행위의 결과라고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부를 살해하고, 생모와 결혼을 하게 됨으로써 일어난 오이디프스의 파멸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그의 잘못된 선택 혹은 행동 대한 안타까움과 그것이 불러낸 처절한 결과에 대한 동정에서 오는 고통스러움이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비극적 슬픔 오이디프스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할 밖에 없게 만들었던, 그를통해 그와 그의 가족 어머니와 그의 안티고네 비극적 운명으로까지 이어지는 어떤 보이지 않는 운명의 피할 없는 손길을 감지하는 데에서 온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비극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형식적으로 보자면 고대 비극에서도 구체적인 명의 개인의 행동이 그를 파멸로 이끌지만, 그러나 그의 행동은 모든 자신의 외적 규정으로부터 자유롭게 스스로의 의지와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근대적 주체의 그것이 아니다.  거기엔 그를 그렇게 행동할 밖에 없게 했던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비극적 주인공들이 저지른 것은 전적으로 스스로 선택된 행위에서 결과하는 윤리적 아니라, „ schuld 무고 unschuld사이에서 흔들리는비극적 , 심미적 죄이다. 그들은, 그들을 파멸로 이끈 행동을 스스로 벌였던 주체라는 점에서는 schuld 지었지만, 그들의 행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을 잉태하고 있는 필연성 따름으로써 생겨났다는 점에서 그들은 또한 무고 unschuld 존재들이다. ‚비극적 슬픔 Trauer’ 이처럼 주인공을 파멸로 이끈 행위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주관적으로 반성되지 않는“, 어떤 어두움의 계기 의해서 생겨난다. ‚죄의 투명성으로 특징지워지는 고통스러움에서와는 달리 여기에서 우리는 누가 비극적 파멸에 죄가 있는지를 투명하게 확정하지 못한다. ( 이야기를 때의 키에르케고르는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이 분석한 인륜적 의식 논의를 따르고 있다. 헤겔에게서도 고대 비극 주인공들의 행동은 부당한 현실에 맞서 인륜적 법칙을 구현해야 한다는 결심의 직접성에 따라 이루어지며, 이러한 즉자성으로 인해 그건 자연적 존재의 의미 갖는다. 금지에도 불구하고 오빠의 시신을 장사지냈던 안티고네의 행동은 자유로운 주체의 의지적 행동이 아니라, 인륜적 법칙의 필연성을 쫓아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의 행동은 자기 자신의 의식에 대해서는 물론 그들의 행동이 펼쳐지는 현실에 대해서도 대자적인 근대적 주체의 행동과 구분된다.)

 

2.

 

19세기 중반 (1843) 글을 키에르케고르는 개인이 가족, 국가, 혈족 등의 실체적인 substantiellen  규정들로부터고립되어 자유로와진 근대에 이러한 비극적인 사라진다고 말했지만, 21세기에 살고있는 우리는 어떤 점에서는 이후 이러한 비극적인 향한 시도들이 오히려 활발하게 추구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그들의 현대인으로써의 외양과 삶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고대 비극의 주인공들의 전범을 따르고 있다. 그들은 현대 사회에 살고있는 명목상의 현대인들이지만, 그들에게는 근대적 주체에게 특유한, 자유로운 의지에 의거해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주관적 개인성이 결핍되어 있다. 그들이 맞이하고, 극복 혹은 대처해야 하는 상황들 재판에 회부되고, 벌레로 변신하며, 낯선 지방에 출장 명령을 받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그들에게 주어지며, 거기에 대처해 나가려는 과정 속에서 주인공들은 운명을 잉태하고 있는 필연성 쫓아 결국 몰락과 파멸의 길로 나아간다. 우리가 카프카의 이야기들에서 느끼는 것은,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는 그들의 선택의 결과 그들이 맞이해야하는 파멸을 바라보는 데서 오는 고통스러움이 아니다. 그러기에는 그들의 너무도 불투명하며, 그들의 주관성은 너무 연약하다.

 

박찬욱의 일련의 복수 씨리즈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비극적인 에로의 지향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복수를 행하는 주체들이 그렇게 밖에 없는인륜적 의식의 주체들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복수의 근저에 깔려있는 것이 모두 가족 관계 - <올드보이>에서의 남매, <복수는 나의 >, <친절한 금자씨>에서의 부모와 자식,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의 손녀와 할머니 라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헤겔과 키에르케고르가 모두 이야기하듯이 가족, 특히 부모와 아이 사이의 Pietät 개인을 인륜적 법칙을 실현하기 위해 그렇게 행동할 밖에 없게 만드는중요한 실체적 규정 하나이기 때문이다. <복수는 나의 >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는 상대가 악인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수 해야만한다. 그의 복수는 스스로의 의지와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자유로운 근대적 주체의 선택적 행동이 아니라 그렇게 밖에 없는 인륜적 필연성에 따른 것이다. 이는 <올드보이>에서 사랑하는 누나를 죽게 만든 오대수에 대한 우진의 복수에도, <친절한 금자씨>에서 유괴되어 살해당한 아이들의 부모가 선생에게 가하는 복수에도, 이보다는 훨씬 온건하고 미화된 형태이긴 하지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 대한 영군의 상상적 복수에도 해당된다. 법적인 처벌이 해소시켜 없는, 스스로 자신의 손으로 직접 가해자의 육체와 대결해 상처를 입히고, 죽이는 방식으로 분출되는 이들의 복수는 그러한 점에서 우리에게 윤리적 아니라 schuld 무고 unschuld사이에서 흔들리는비극적, 심미적 죄로 받아들여진다.

 

넓은 의미에서 이러한 비극적인 회귀는 <택시 드라이버> 이후로 오늘날까지도 심심치않게 등장하고 있는, 가해자 혹은 살인자를 경찰과 국가 기관의 처벌과 판결에 맡기는 대신 자신의 손으로 직접 붙잡아 처벌하고 복수하는 소위 사적 처벌Selbstjustiz’ 테마에서도 드러난다.

 

3.

 

키에르케고르는 비극적인 것을 잃어가는 시대는 그로 인해 많은 회의 Verzweifelung“ 얻게 된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타인의 행동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동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심미적기준 보다는 점점 좁은 의미의 윤리적기준을 적용하며, 그를통해 혹은 우리 자신의 행동을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로만 환원되는 사적인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러한 죄의 주관화/내면화 악인 등장과도 관련되어 있다. 고대 비극에서 우리는, 전적으로 자신의 자유로운악한 의지에 의해 행동하는 악인이라고 불릴 인물 유형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악인 개인이 모든 다른 실체적인 규정들로부터 고립되어 스스로가 자기 행동의 자유로운 주체로 등장함으로써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칸트가 자신 행위의 근거를 어떤 외적, 감각적 조건들에도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자신 내면의 자유( 심연) 가지고 있는 근대적 주체를 설정하기 위해 급진적 das radikale Böse’ 전제하지 않을 없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 오죽하면 내가 이런 짓을 하겠는가라고 말하는 의식은 이러한 죄의 주관화/내면화 대한 힘없는 저항이다. 의식은 그를 통해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비극적/심미적 이해받기를 요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