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인간

후회

김남시 2008. 5. 31. 05:53

 

-          작은 일에서만 후회한다. 아이를 데리고 버거킹이나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사먹어야 , 50 센트 차이로 mini 메뉴와 maxi 메뉴를 구분해 놓은 그들의 고약한 가격표는 분노스러운 곤혹에 빠지게 한다. 메뉴에 그리고 광고판에 붙어있는 사진을 보고 주문한 햄버거가 헐벗은 자신의 모습을 내보였을 , 뒤늦게 복잡한 메뉴판 속에서 내가 주문한 것보다 가격에, 많은 감자튀김 혹은 종이컵의 콜라를 받을 있다는 발견했을 때의 좌절감은 알지 모를 분노와 뒤섞여 하루의 기분을 망쳐버린다.

 

-          이렇게 나의 일상을, 나의 하루를 값싸게 망쳐버릴 있게 하는 후회는 도처에서, 책을 사야할 것인지, 책방을 뒤져보아야 것인지를 고민하게 하는 책방에서, 반쯤만 익은 쌀과 돼지고기 혹은 생선 튀김과 감자 샐러드 사이를 선택해야 하는 학생 식당에서, 혹은 간격으로 새로이 무엇인가를, 아이포드를, 노키아 핸드폰을 아니면 무선 모뎀을 덤으로 끼워주는 인터넷 회사들의 광고 공세 속에서, 후회는 매혹적이고도 위협적인 손길로 끌어들이고는 뒤늦게 찾아오는 깨달음으로 고통스럽게 만든다.

 

-            노트북을 장만하여야 때면, 그것이 3킬로그램이 넘는, 그래서 매일 그를 지고 다니는 나의 어깨를 땅을 향해 내리 누르는, 급기야 그를통해 삶의 의욕까지를 상실하게 만드는 구식 노트북일지라도, 고민없이, 가장 가격을 고르는 것으로 간단하게  해결될 있는 선택의 의무는, 작은, 단지 1 내지 2 유로의 사소한 차이들로 무장하고 내게 고통스러운 선택을 강요하는 상품들 앞에선 끔찍한 불안감으로 돌변한다. 불안감은, 선택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그만큼 사소하기 때문에 더욱, 사소함 앞에서 내가 그토록 고민하고, 결과로 그렇게 괴로와해야 한다는 바로 사실 때문에 증폭된다.

 

-          후회가, 니체의 말처럼 이미 벌어진 과거를 받아 들이지 못하는 의지의 무능력에서 기인한다면, 그런 점에서 그것이 우리가 , 매일같이, 거의 하루도 거르지않고 경험해야 하는 일상적 르쌍띠망이라 있다면 후회는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이 영원 회귀의 쨔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행한 군중 무리의 하나에 다름 아님을 시퍼렇게 깨닫게 해준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이 속에 고귀한, 귀족적 근원을 가진 원수에 대한 복수를 감추고 있는 르쌍띠망의 도덕이라고 한다면, 후회는 속에서 후회스러운 선택을 자기 자신에 대한 복수를 함축하고 있다. 후회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거의 의지에 대해, 의지를 발한 자기 자신을 복수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것도 어떤 거대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도 아닌, 사소한 일상의 선택을 후회하는 나에게, 온갖 사소한 선택의 의무들로 가득차 있는, 점점 가득차고 있는 세계는 그래서 위협해오는 위험스러운 정글이다.

 

-          후회가 내포하는 이러한 분열적 자기 공격을 가장 미워했던 이들은, 아도르노가 말하길, 세계의 계산 가능성과 자기 행동의 합목적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내세웠던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부르주아 계급에게 후회란 그들의 자랑스러운 계산적 합리성과 합목적성이 좌절했다는 폭로하는 치명타이며, 때문에 부르주아적 실천은 후회라고 불리는 퇴행으로부터 자신을 유지하는 [1] 주요한 과제로 삼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후회라는 분열적 자기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있을까? 우린 우리의 계산적 합리성을 최대한 발휘하여 모든 꼼꼼하게 따져봄으로써, 모든 상품 광고들이 현란한 제스쳐로 약속하는 후회하지 않는 선택 있는 것일까? 우리의 원시적인 계산적 합리성을 훌쩍 뛰어넘고 질주하는 상품들의 무한한 불가해성 앞에서 그러나,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나의 선택이 다른 하나에 대한 포기를 의미할 밖에 없게하는 우리의 낮은 경제적 경쟁력을 가지고?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선택하고서도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을 있는, 니체가 말하듯 모든 선택에 대해 내가 그를 원했었다 ich habe es gewollt’ 후회없이 말할 있는 도저한 깊이의 삶의 태도를 터득해야 하는 것일까?



[1] Adorno & Horkheimer : Dialektik der Aufklärung, S.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