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인간

그때 거기

김남시 1999. 9. 12. 20:00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중에서)

언제부턴가 내 삶을 버티고있던 밧줄을 놓쳐버렸다. 두팔을 다 써서 감싸야 할 만큼 내 가슴에 몰아친 물살이 차가왔던 때문이다. 그후 여기저기를 더듬어보았지만 내가 놓쳐버린 실마리는 잡히지 않았다. 내 몸은 질척거리며 타오르던 권태의 불길에 타들어가고 삶은 풋풋한 옷을 벗고 추악한 욕망을 드러내 보였다. 아는 사람들의 표정이 낯설어지고 난 그 누구하고도 악수한번 나누지 못했다. 내가 하는 말들이 그들을 화나거나 쓸쓸하게 만든다는 걸 안 이후 내 입에선 악취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도 나와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웅웅 거리는 보일러 소리는 이 집 전체를 싣고날으는 우주선의 엔진소리같다. 닫혀진 창밖으론 몇겹의 어둠이 흘러간다. 그 안에 앉아있는 난 저 멀리서 반짝이는 지구로부터 10광년쯤 떨어진 곳에 있다. 유일한 교신장치는 고장난지 오래다. 난 나의 지금을 이렇게 '남겨놓을 수 '있을 뿐이다. 그 언젠가 어느 별에서 나의 글은 낯선 외계인에 의해 발견될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의 날 이해할수 있을까. 이 끝없는 공간을 떠 다니는 나의 고독과 천애의 외로움을 그는 약병 속 설명서처럼 폐기시킬 것이다. 그렇담, 나의 지금은 아무에게도 교신되지 못한 채 흩어져 버리게 된다.
교신되지 않은 지금은 없다. 난 나의 지금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있는 중이다. 언젠가 이 집이 아인스타인의 공간속에로 진입해 들어간다면 난 지금의 나를 다시 상봉할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처럼 나를 남겨놓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지금은 지금의 나와 동일할 것이다. 결국, 교신되지 않은 나는 튀는 음반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을 것이다. 있을 것이다. 있을 것이다...
남은 식량과 물은 약 1달치, 그것도 김치볶음밥을 만들 수 있는 재료들 뿐이다. 이 집은 24시간에 한 번씩 자전하면서 알지못할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 창이 태양쪽을 향해있는 12시간동안엔 집안 깊숙한 곳까지 햇빛이 스며 비친다. 그럴 때 주로 난 오른팔을 위로 향한채 바닥에 배를대고 엎드려 햇볕을 즐긴다. 이집의 추진기관은 난방기능도 겸하고 있다. 배를 따뜻하게 하는 바닥과 얼굴을 간지럽히는 햇볕은 날 기분좋게 한다. 눈을 뜨면 난 창밖이 어두어졌음을 깨닫는다. 난 잠이 들었던 것이다. 엔진은 여전히 웅웅거리며 회전하고, 태양의 반대편으로 자전한 차창엔 근처의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다. 난 배가 고픔을 느끼고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는다.

난 입을 벌린채 눈을 감았다. 의자에 몸을 맡기곤 시간이 나의 상처를 애무해줄 때 까지 그대로 누워있었다. 어지럽게 걸려있는 옷가지들처럼 나의 삶은 아직 정리되지 못했다. 아니, 영원히 정리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삶이란 개어서 챙겨넣을수 있는 양말들이 될 수 없으므로. 이 집을 싣고가는 우주선의 승선감은 무척 훌륭한 편이다. 지금껏 한 번도 멀미나 어지러움을 느낀 적이 없다. 그런데 가끔씩 세워놓았던 깡통이 넘어져있거나 빈 우유통이 쓰러져있거나 한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운석들 사이를 통과하느라 잠시 흔들렸던게 분명하다.

가끔씩 창문을 열고나가 바깥의 바람을 맞는다. 저 거대한 어둠의 심연. 멀리서 반짝이는 혹성들. 저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 나를 간신히 붙들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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