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문자, 미디어

'여보세요' 와 전화 커뮤니케이션

김남시 2006. 1. 23. 23:17

벨이 울린 수화기를 받아들면서 우린 여보세요라고 말한다. 마치 상대를 향해있는 것 같은 이 모호한 언어행위는, 그러나 사실 아직 상대와의 어떤 관계도 맺고있지 않은, 수취인 불명의 발화다. 이 말은 다만 수화기를 들은 내가 지금, 여기현존하고 있다는 것만을 지시하는, 전적으로 주관적인 시그널이다. ‘여보세요라는 을 통해 나는 나의 현존을 지시하며, 내가 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전적으로 나에게만 속하는 그 말은, 내게 전화를 건 모든 가능한 존재자들에게 다만 나의 현존만을 알리는 순수한 주관적 언어다.

 

여보세요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주관적 성격은 그 말을 하는 순간의 내게, 전화기 저쪽의 보이지 않는 상대가 전혀 규정되지 않은 상태라는 데서도 드러난다. 내가 여보세요라는 말을 통해 나의 현존과 나의 « 말할수 있음 »을 알리는, 그러나  아직 나의 여보세요에 응답하지 않는 저 전화기 바깥의 상대는, ‘지금, 거기에 현존하고 있지 않을 수도, 혹은 말을 하지 못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그는 어쩌면 자동 기계일지도, 외계인 혹은 유령일지도 모른다. 그가 설사, 나처럼 말할 수 있는 한 명의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가 나의 여보세요에 아직 반응하지 않는 한 그는 어떤 육체적 지표를 통해서도 신원확인 되지않는 익명의 대상이다. 그는 여보세요라는 말을 통해 전달되는 나의 현존만을 확인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릴수도, 침묵해 버릴수도, 아니면 버럭 소리를 지를 수도 있다. 이 모든 상대의 반응을 여보세요를 말하는 순간의 나는 결코 예상하지 못한다. 나는 여보세요라고 말하고는, 무력하게 그저 상대의 반응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아직 반응하기 전의 저 상대는 내게 절대적 타자. 그와 나와의 커뮤니케이션 가능성은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있다.

 

상대가 나의 여보세요에 언어적으로 반응하는 순간에 비로소, 나의 여보세요는 구체적인 수취인을 얻는다. 처음엔 전적으로 나의 현존과 말할 수 있음만을 지시하던 주관적 시그널은, 그를통해, 말하는 두 주체 사이의 대화를 선도했던 최초의 호출행위가 된다. 그 반응을 통해 비로소 나는, 상대가 나와같은 말할 수 있는 존재로 전화기 저 편에 현존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나아가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지인인지 낯선이인지, 내게 호의적인지 공격적인지 등, 그와의 구체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진입하기 위한 나의 모드를 결정한다.     

 

전화는 이처럼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에 무규정적 공백의 순간을 만들어내었다. 상대와의 대면적 커뮤니케이션이 그의 육체적 현존을 전제하고 따라서, 그의 육체적 지표 성별, 나이, 인종, 친소 여부 등 를 통해 알려지는 커뮤니케이션 지평의 선 규정성을 제공해주었다면, 전화는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이전의 선이해의 가능성을 차단시켰다. 그로인해 전화는 마치 준비되지 않은 채 불쑥 맞이해야 하는 낯선 침입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 우린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채 걸려오는 전화를,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늘 받아야만한다. 장난 및 음란전화, 전화를 통한 무차별 광고 등은 전화 커뮤니케이션이 만들어 놓은 저 공백의 순간을 악용하는 사회적 결과물이다.

 

걸려오는 상대의 전화번호가 찍히는 핸드폰과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화상 전화 등은 이를 극복하려는 기술적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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