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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통역에서 주체의 문제

김남시 2005. 10. 1. 01:36

 

외국에서 유학생이 있는 아르바이트는 그렇게 많지않다. 어떤 이들은 공장에서 일을 하거나, 박람회등에서 물건을 팔기도하는데, 그래도 가장 조건이 좋은 하나는 통역 아르바이트다. 베를린에서 나는 수차례 통역 아르바이트를 했다. 텔레비젼 브라운관을 생산하는 삼성 SDI베를린 공장에서다. 유럽지역에 수출하는 브라운관을 생산하는 공장에 삼성은 정기적으로 한국 기술자들을 보내 제품이 품질기준에 맞게 생산되고 있는지를 점검하게 하는데, 이들 한국과 독일 기술자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삼성은 나같은 값싼 유학생들을 통역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베를린에 있는 대부분의 산업지역들 처럼 공장도 동베를린 지역에 있다. 공장부지와 건물은 이미 독일이 통일되기 전부터 사회주의 동독에서 브라운관과 텔레비젼을 생산하던, 텔레비젼 생산을 위한 « 인민 소유 공장 VEB : Volks Eigenes Betrieb» 것이었다. 독일이 통일되고 나서 삼성은 공장부지와 건물을 베를린시로부터 들였고, 베를린 시는 졸지에 실업자가 뻔했던 동독 기술자와 노동자들을 구제해준 한국 기업을 위해 그를 단돈 1유로라는 상징적 가격에 넘겨주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소수의 독일인 경영진들을 제외하고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기술자들은 모두 사회주의 동독에서 기술과 일을 배웠던 Ossie « 동쪽사람 » 들이다. 내가 통역을 할때 자주 만났던 Schneemann (눈사람)  할아버지도 역시 동독 출신 엔지니어다.  나는 거의 관리되지 않고 있던 공장내 낡은  창고 캐비넷에서 동독시절 자료들을 발견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 눈사람 » 할아버지가 동독 인민공장 시절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사업부일을 담당했었다는 알아내기도 했다.

 

나오키 사카이의 책은 곳에서 통역을 때마다 내가 느꼈던 막연한 불편함들이 어디에서 기인했던 것인가를 분명한 언어로 사유할 있게 주었다. 그리고 그건 바로 그의 책의 핵심 테마인 통역에 있어서의 주체 문제였다. 통역 무엇보다 불편하게 했던 가운데에 놓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통역자에 대한 태도였다. 그들은 통역자인 내가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투명한 필터이기를 원한다. 한국어로 말하는 이는 자신의 말이 «  »라고 하는 필터를 통과해 그대로 마주 서있는 독일인에게 전달되기를 원하고, 독일어로 그에 답하는 이도 역시 나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입장과 태도가 « 있는 그대로 » 한국인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나오키 사카이의 말처럼 암묵적으로 한국어와 독일어가 하나의 완결된 systematic wholes 이며, 통역이란 완결된 전체로써의 언어 사이의 동등한 교환으로써 homolingual communication 이룬다고 하는 regime of translation 이데올로기[1]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저 이데올로기는 두 언어 사이에 « 어쩔 수 없이 끼여있는 번역 혹은 통역자라는 주체 »가 그들 사이의 소통으로부터 깔끔히 «지워져 버리기»를 바란다.[2]  

 

“The translator who is present to both the writer and the readers regulates communicative transactions, but her mediation must be erased in the representation of translation according to which the message issued by the writer in one language is transferred into an equivalent message in another language, which is then received by the readers. In these cases as well, the writer addresses the readers with the presumption of a homolingual communication. The assumption that one can make oneself understood without perceptible hindrance, as long as one belongs in the same linguistic community, survives intact here.”[3] 

 

이러한 번역자의 Subjectivity의 문제를 나오키는 번역시 발생하는 Pronominal Disjuction 통해 구체화시키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자는 명의 대화 상대자 사이에서 „1인칭인 로 등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자는 기껏해야, 두 다른 언어 사용자들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혹은그녀 옮기는 간접화법의 주체만 있을 , 결코 대화 속의 주체로 등장하지 못한다. 나오키는 이를통해 번역자는 대화 가운데 있기는 하지만 대화 상대자의 어느 편에도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를 꺼리는, 방관자이자 무심한 관찰자로 된다고 말한다.

„The translator would have to take the attitude of a bystander who presides over the event in which the message is addressed to the addressee. The translator cannot take the pronominal position of either the first of the second person in the putatively personal address of this communication, yet has to participate in this situation… as a bystander, as an indifferent observer who denies immediate involvement but nonetheless is present at the scene.”[4]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의 이러한 생각은 통역 혹은 번역에서 발생하는 시점의 변화를 너무 단순화시킨데서 나온 것이다. 통역을 통해 대화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대화에서 통역자의 주관성을 의식하지 못 (혹은 안) 한다고 해서, 통역자의 주관성이 완전히 지워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저 사라지지 않는 통역자의 주관성은 오히려, 통역자가 두 대화 상대자의 혹은 그녀로 옮기는 과정 속에서 작동한다. 이러한  Pronominal Disjuction 나오키는 통역자의 주관성이 제거 혹은 사라지는 현상으로 설명하지만, 내가 보기엔, 오히려 바로 속에는 대화 상대자들의 당신이라는 일대일의 관계가 통역자의 혹은 그녀라는 삼인칭을 통해 대상화되는 반성과정이 숨겨져있으며, 그건 통역자의 주관성의 제거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발양을 매개로 해서만 일어난다.  구체적으로 이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실제 통역에 있어 통역자인 나는 자신을 다른 언어 사용자 사이에서 1인칭의 주어로 지칭할 수는 없지만, 내가 말을 옮겨주는 상대를 당신이라 호출할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 나는 한국인 기술자의 말을 독일 기술자에게 옮기면서 그는 이러저러한 일을 <당신>에게 요구합니다.”라고 말하고, 거꾸로 독일 기술자의 말을 그가 <당신>에게 이러 저러하다고 말합니다라고 옮긴다. 이때 나에 의해 호칭되는 당신, 예를들어 독일 기술자는 한국 기술자에 의해서, 그리고 통역인 나에 의해 이중으로 호출되는 상대다. 투명한 통역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통역에서 통역자의 주관성이 사라져야 한다면, 한국 기술자에 의해, 그리고 나에 의해 호출되는 독일기술자 <당신>  결국 동일한 the addressee 다름 아니며 통역자인 나의 주관성은 그를 호출한 한국 기술자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통역자란 다만 투명한 필터로써, 나오키가 말하듯, 어느 편에의 직접적인 개입으로부터도 떨어져있는 방관자이자 무심한 관찰자일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통역을 하는 나는 자신을 말하는 상대의 주관성과 동일시하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예를들어, 한국 기술자가  불량에 책임이 있는 독일 기술자에게 책임을 물으며, 그를 비난할 때가 그렇다.  경우 나는 자신을  책임추궁이라는 pragmatic 언어 행위를 하는 한국 기술자와 동일시 없다. 나는 오히려 그의 주관성으로부터 거리를 취해야 하며, 한국어의 언어적 공간이 만들어내는 pragmatic 효과를 대상화시켜서 바라보고, 그를 독일어라는 다른 언어 속에서 유사한 기능을 말을 통해 독일 기술자에게 전달해야 한다.  과정에서 내게는  모국어로서의 한국어 자체에 대한 대상화와 동시에, 내게 외국어로서의 독일어 자체에 대한 반성적 대상화가 동시에 요구되며, 그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나의 주관성이 작동될 밖에 없다.

 

이것은 다른 언어 사이의 통역이 단지 말에 담겨있는 정보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자면, 번역이란 언어 속에 들어있는 언어적 내용” ` Gemeinte 그에 상응하는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언어 속에서 그를 이야기하는 방식 Art des Meinens 찾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번역 작업을 통해 순수언어 reine Sprache 향한 언어의 운동에 참여하는 번역자는 그리하여,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단순한 번역기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는 시인과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언어 사이에서 통역을 우리는 그들이 말의 정보만이 아니라, 정보가 표현되고 전달되는 방식에도 주목해야 한다. 나는 말뜻 그대로 번역했을때 독일인에게 오해와 감정을 불러일으킬 있는 한국어 단어와 표현을 고려해야 하며, 독일어식 어법이 한국어로 그대로 옮겨졌을 발생시킬 문제들을 생각해야 한다. 말하자면 통역자는 서로 다른 언어가 함축하고 있는 서로 다른 삶의 형식 그대로 맞부닥쳤을때 생겨날 있는 Misscommunication 가능성을 회피해야하는데 그를 위해서는 서로 다른 삶의 형식에 대한 자신의 경험이 동원되어야 한다.        

 

통역자의 주관성은 나아가 현실에서 살아가는 두 대화 상대자들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역관계를 고려하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한국에서 온 기술자들과 독일의 기술자들은 엄밀히 말해 동등한 대화 상대자들은 아니다. 자신의 일자리가 한국 기술자들과 나아가 한국인 관리자들의 인사평가에 달려있다는 것을 아는 독일 노동자와 기술자들은 한국 기술자들 앞에선 수세적이고 방어적이게 된다. 이는 독일 공장에서 불량이 발생했을 경우엔 더 심해지는데, 불량의 원인을 찾으려는 한국 기술자들 앞에서 품질을 책임져야할 독일 기술자들은 마치 선생님에게 잘못을 추궁받는 학생처럼 주눅이 든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통역을 할 경우 나는 주로 독일 기술자의 편에 감정 이입을 하게 되는데, 이는 당연하게도 나 자신의 경험 예를들어, 권력관계에서 약한자에게 더 우호적이라던가, 삼성이라는 기업과 그들의 인사관리 방식에 대한 평소의 불만 등 , 나의 주관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내 생각에, 나오키가 말하는 번역자의 주관성의 문제와 나아가 그로부터 그가 도출해내고 있는 아시아와 서구의 두 문화 사이에 끼여있는 지식인들의 문제는 번역과 수용자의 일방적인 번역모델에 근거하고 있다. 거기서 수용자로서의 독자는 원래의 텍스트를 이루고 있는 외국어를 알지 못하며, 따라서 번역자에 의해 제시된 외국어 번역이 올바른지, 틀린지를 판단할 수 없다. 이를통해 그 외국어는 그것의 구체적, 경험적 모습에서가 아니라 다만 자국어와의 상상적인 대응관계 속에서 하나의 통일체로, 규제적 이념 regulative idea’으로만 파악된다.[5] 

나오키의 이러한 일방적 번역과 수용의 모델 대신에 나는 서구와 아시아의 관계를 통역자를 사이에 두고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통역을 통한 소통의 모델로 파악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이 말을 할 때 나는 마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서의 하버마스 같다!) 번역서의 일방적 수용의 경우에서와는 달리, 통역을 통한 대화에선 통역자를 통해 옮겨진 상대의 말은, 계속되는 대화과정 속에서 상호 검증된다. 대화자는 비록 상대의 언어 자체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언어를 통해 발화된 상대의 말을 통역을 통한 대화 과정 속에서 재차 확인할 수 있으며 그를통해 통역이 틀렸는지 맞았는지를 판단할 수도 있다. 나는 내가 잘못 통역한 내용이, 진행되는 대화 속에서 멋지게 수정되고 합의에 도달되는 과정을 직접 경험한 바 있다.

허나,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의 세게는 다만 언어적 소통관계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우릴 허탈하게 한다. 그 언어적 소통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이 위협받는다면 서로 다른 언어 사이의 소통은 아예 불가능해질수도 있다. 며칠 전 삼성은 올해 말을 기점으로 베를린의 브라운관 공장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일하는 약 800 여명의 독일 엔지니어와 기술자들은 졸지에 실업자가 될 것이고, 나는 앞으론 그곳에서 통역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1] Naoki Sakai : Translation and Subjectivity. on “Japan” and Cultural Nationalism, 1997 Minnesota, S.51-52.

[2] Naoki Sakai : Translation and Subjectivity. on “Japan” and Cultural Nationalism, 1997 Minnesota, S.10.

[3] Naoki Sakai : Translation and Subjectivity. on “Japan” and Cultural Nationalism, 1997 Minnesota, S.10.

[4] Naoki Sakai : Translation and Subjectivity. on “Japan” and Cultural Nationalism, 1997 Minnesota, S.53.

[5] Naoki Sakai : Translation and Subjectivity. on “Japan” and Cultural Nationalism, 1997 Minnesota, ff.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