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dergarten

아이와 이데올로기

김남시 2004. 3. 11. 06:59
 

아이를 키우는 데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그것도 많이.

아이가 사탕이나 초코렛만을 먹어려고 할 때, 아이가 이빨 닦기를 싫어할 때, 아이가 밤에 잠을 자지 않으려고 할때, 아이가 엄마, 아빠의 요구를 듣지 않으려 할 때, 그 아이를 벌거벗은 폭력으로 위협하거나 강요하지 않으려면 우린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이데올로기를 투입하여야 한다.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 거짓이자 허위이고, 나아가 진리에로의 길을 가로막는 '폭력'이라고만 생각하는 고전적 이데올로기론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이를 키울 때 이데올로기의 '폭력' 대신, 물리적 폭력에 호소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저 육아에 필요한 이데올로기가 그저 진리와 진실을 뒤덥는 허위와 거짓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이에게, 아이를 키우면서 적용시키는 이데올로기는 때로는 우리가 아이들에게서 발양시키고 키우고자 하는 그들의 '상상력과 판타지'에 상응한다.

단 것과 초코렛을 많이 먹으면 이빨에 '벌레'가 생겨서, 그 벌레가 네 이빨을 몽땅 갉아먹어 버린다! 는 이데올로기는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무시무시하고 징그럽게 생긴 벌레와 그 벌레가 갉아먹은 이빨의 가련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아이에게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잠을 자지 않으면 모래 주머니를 맨 모래 아저씨가 찾아와 너 눈에 모래를 뿌릴 것이다! 라는 이데올로기는 눈에 모래가 들어갔던 아픈 경험을, 폭력적으로 눈에 모래를 던지는 무서운 모래 아저씨에 대한 상상과 연결시킬 수 있는 아이의 능력을 전제할 때에만 효과를 갖는다. 지금, 현재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상상할 수 없는 빈곤한 상상력을 가진 아이에게나 지금까지의 부정적 경험으로 인해 아빠, 엄마의 말의 신빙성을 도무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아이들에겐 이런 이데올로기가 작용할 수 없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세상엔 육아에 필요한 이런 이데올로기들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어른들이 있었고, 그들에 의해 수많은, 아이의 행동을 유도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보조장치“들이 만들어졌다. 착한 일을 한 아이에게 선물을 주는 요정, 은혜를 갚는 까치나 호랑이, 부모의 말을 듣지않아 당나귀로 변해버린 게으른 아들, 주제넘은 욕심을 부리다 배가터져 죽은 개구리 등이 등장하는 동화책은 아이들에게 저 이데올로기들이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준다. 어디 그 뿐이랴. 아이들이 좋아하는 티브이 프로그램 속 주인공들과 학교나 유치원의 선생님들, 아이 친구의 부모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아이에게 저 이데올로기들의 진실성을 필요할때 마다 확인시켜 준다.

이쯤되면 아무리 부모 말의 진실성에 깊은 회의를 갖고있는 아이라도 그 이데올로기를 '사실'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비트겐스타인이 말했듯, 우리의 일상적 삶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만을 진리라고 믿는 실증주의적 삶의 방식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린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또 경험할 수 없는 수많은 사실들을 진리라고 확신해야만 일상생활이라는 언어게임에 참여할 수 있다. 엄마, 아빠와 선생님, 친구의 부모들 그리고 자길 굳이 속일 이유가 없는 책들과 테레비젼에서 모두 그렇다고 말하는데 왕따당할 심산이 아니라면 나 혼자 그 사실을 의심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독일 테레비젼에선 저녁 8시 정각이면 모래 주머니를 맨 '모래 아저씨'가 등장해 짤막한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고는 아이들을 향해 모래를 던지고 사라진다. 이제 아이들은 잘 시간이 되었으니 잠자리에 들어라는 메시지다. 엄마, 아빠에게 말로만 듣던 '모래 아저씨'가 정. 말. 로. 테레비젼에 등장한 걸 본 아이들은 황급히 옷 갈아입고 잠 잘 준비를 하고, 오늘도 아직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모래 아저씨 이데올로기는 저녁시간에 할일을 남겨놓은 부모들을 안심시킨다. Gute Na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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