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정치적인 것의 소멸

김남시 2012. 7. 22. 14:11

마키아벨리가 <군주론>(1513)에서 내놓은 정치에 대한 관점은, 정치를 이전까지의 종교적, 윤리적 규범과 가치로부터 독립시킨 근대 현실주의 정치사상의 기원으로 통한다. 예를들어 그 책의 18군주는 어디까지 약속을 지켜야 하는가에서 마키아벨리는 신의를 지키며 기만책을 쓰지 않고 정직하게 사는것은 칭송받을 만한 일이지만, 현명한 정치가라면 신의를 지키는 것이 그에게 불리할 때스스로를 그 규범에 복속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약속을 지키지 않는길을 택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하지만 이런 현실주의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 현실주의적 태도로 인해 정치가가 수행해야 하는 필수사항이 있다. 사람들이 칭송하는 종교적, 윤리적 성품을 정치가가 실제로 갖출 필요는 없지만 갖춘 것처럼 보여야하는것이다. 실제로 자비롭고, 신의가 있고, 인간적이고 정직하며, 경건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보여야하는 이유는 그래야 정치가(군주)로서의 위엄과 권위가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밖으로 드러낸 외양을 볼 수는 있지만, 당신이 진실로 어떤 사람인가를 직접 경험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기에, 그에게는 자신의 존재(Sein) 자체가 아니라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Schein)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마키아벨리즘이 근대 정치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면, 우린 오늘날 대한민국 이명박 정권하에서 그와는 구별되는 중요한 정치사상적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목도한다. 정치가들은 더 이상 외관상으로도 자비롭고 신의가 있고, 인간적이며 정직하게 보이려고 노력 하지 않는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자신 또는 계파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며, 그에 방해가 되는 문제제기는 거칠게 묵살하고, 그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해고시키며, 자신에게 충성하는 이들에게 보은 인사를 한다. 이전 시대 정치사에서 간혹 존재했던, 명예심있는 인간이라면 할복이라도 할 만큼 부끄럽고, 쪽팔리고, 노골적인 행적이 공공연히 드러났어도 수치심을 느끼기는 커녕, 이들은 어떤 외관상의 명분도 없이, 그들이 가진 기득권과 권력에, 쫓아도 쫓아도 끈질기게 날라오는 파리 떼처럼 들러 붙어있다. 엠비씨 사장, 인권위원회 위원장, 카이스트 총장 뿐 아니라 현직 대통령에게서도 발견되는 이런 모습은, 정치영역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던 명예’, ‘공정함’, ‘도덕적 정당성같은 가치가 이제는 겉으로라도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을, 적어도 외관상으로라도 공공적 가치가 통용되던 정치의 영역이 이제, 욕을 먹건 수치심을 느끼건, 얼마나 쪽팔리건, 필생즉사로 자리를 붙들고 있도록 강요하는 맹목적 삶의 논리에 잠식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