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스크랩] (4월 27일) 시간, 자본주의적 순환, 파국

김남시 2010. 4. 27. 17:35

적어도 근대 이전까지 서양 문화사에서 시간은 파괴적 원리의 대변자였다. 시간은 전사의 강함과 젊음, 자기 모습에 취해있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앗아갈 뿐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들을 폐허로 만들어버리는 영원한, 가장 강력한, 그 누구도 이겨본 적 없는 파괴자였다. 1505년 처음 출간되어 서양 정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히로글리피카>는 시간의 파괴적 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토록 위대한 많은 나라들과 그렇게나 유명한 도시들의 폐허를 생각하는 사람, 그 거대함으로 인해 도저히 멸망하거나 몰락할 수 없으리라 여겨지던 모든 제국들의 종말에 대해 숙고하는 사람은 이 모든 위대한 것들을 파멸시킨 단 하나의 원인이 바로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시간은 천천히, 하지만 중단없이 나아가면서 모든 것들을 자기 속으로 삼켜버리는, 모든 피조물들의 무덤이다." (Horapollo, Hieroglyphica I. 1, Emblemata. hg. A. Henken, A. Schoene, 653 쪽)

 

 

천천히 하지만 끊이지 않고 흘러가면서 살아있는 모든 것을, 젊음과 아름다움을, 인간이 만들어 놓은 도시를, 모든 위대한 제국과 문명을 파괴시키는 시간, 이로 인해 시간은 인간의 모든 세속적 애씀과 그로부터 생겨난 영광과 아름다움 따위를 모두 덧없는 것 vanitas 으로 만들어 버리는 영원한 승리자였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 이러한 파괴적 시간에 대한 표상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주목할만하게도 그러한 변화는 자본주의의 성장과 맞물려 있다. 사무엘 베버 Samuel Webers는 짧지만 흥미로운 책 <돈은 시간이다. 신용과 위기에 대한 사고 Geld ist Zeit. Gedanken zu Kredit und Krise, 2009 diaphanes>에서 이를 적시한다.

 

베버는 그러한 변화의 유력한 출발을 1748년 벤쟈민 플랭클린이 쓴 글 "젊은 사업가에게 주는 충고"에서 발견한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유명한 격언을 처음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던 이 글에서 벤쟈민 플랭클린은 경험많은 늙은 사업가로 등장해, 이제 본격적으로 일선에 뛰어들려고 하는 젊은 사업가에게 충고를 해 준다. 그리고 그의 충고에는 한창 성장해가고 있었을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원리가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벤쟈민 플랭클린이 젊은 사업가에게 해주는 여러 충고 - '시장으로의 길이 부로의 길이다. 시간도 돈도 낭비하지 말고 그로부터 최선의 것을 만들어라', '신용이 돈이라는 사실을 잊지마라' 등 - 중 시간의 의미론과 관련해 특기할 만한 것은 다음의 것이다.

 

"돈이 본성상 산출과 잉태의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돈은 돈을 산출할 수 있으며 그 씨앗들은 더 많은 돈을 산출할 수 있다. 5실링은 돌고나면 6실링이 되고, 다시한번 돌고나면 6실링 3펜스가 되는데 이는 100 파운드가 될 때까지 계속된다. 더 많은 돈이 있으면 그건 매번 돌 때마다 더 많이 산출하며 그를 통해 이윤은 점점 더 빠르게 늘어난다. 어미 돼지를 죽이는 사람은 그 돼지의 자손 모두를 수천세대에 이르기까지 파괴시키는 것이다...."

 

돈이 산출과 잉태의 힘을 가지고 점점 더 많은 돈을 산출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돈이 자본주의적 순환체제 속에서 순환하기 때문이다. 5 실링의 돈을 투자해 제작한 상품이 시장에서 팔리면 애초의 돈엔 1실링의 이윤이 붙어 사업가에게 되돌아온다. 이렇게 더 많아진 돈은 다시 순환과정에 투입되어 더 많은 돈을 낳으며 이런 방식으로 사업가가 이윤을 얻게되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진다. 돈의 잉태와 산출의 힘은 마치 어미 돼지의 그것과도 같다. 어미 돼지가 낳은 돼지들이 또 다른 돼지들을 낳고, 그렇게 생겨난 돼지들은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다른 돼지들을 불려놓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어미 돼지 같은 돈을 죽인다면, 말하자면 순환시키지 않고 써 버린다면, 그는 그로부터 산출될 수천세대의 돈을 파괴시키는 것과 같다. (여기서 '돈 Geld'이 돈 Schwein'과 같은 단어인 것은 한국어적 우연에 불과하다.)

 

돈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스스로를 재생산하면서 점점 더 증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시간 이다. 잘 자란 어미 돼지가 새끼를 낳고 그 새끼들이 다시 다른 돼지를 낳기 위해 시간이 걸리듯 돈이 더 많은 돈을 낳고 더 많은 이윤을 가져다 주기 위해선 그것이 순환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요소들이 불변한다면 여기서 시간은 그를 통해 적은 돈을 더 많은 돈으로, 약간의 이윤을 더 많은 이윤으로 증식시켜 준다. 투자-생산-판매의 순환을 통해 점점 더 많은 돈과 이윤을 가져다주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시간은 이제 모든 것을 몰락시키는 파괴자가 아니라, 돈을 재생산하고 더 많은 이윤을 산출시키는 생산과 증식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돈을 순환시킴으로써 돈을 생산해내는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에는 그 어느 때보다 믿음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당장 자신의 수중에 있는 돈을 생산/사업을 위해 투자하려는 사람은 그렇게 해서 눈 앞에서 없어지는 돈이 '시간'이 흐른 뒤 더 많이 증식되어 되돌아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지금 당장 가지고 있는 돈은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지만 시간은 그를 다시 재생시켜 더 크게 되돌려 줄 것이라는 믿음. 투자하지 않는 돈은 유한하며 언젠가는 - 어미 돼지를 죽이듯 - 소모되어 버릴 수 밖에 없지만, 시간을 담보로 순환시킨 돈은 오히려 더 크게, 어쩌면 더 강고하게 부활되어 되돌아 올 것이라는 믿음이.

사무엘 베버가 적절하게 지적하듯 제대로 기능하는 자본주의가 그 기반을 제공하고, 또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선 필수적이기도 하는 이러한 복합적 믿음의 체계는 기독교적 구원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죄를 짓고 타락한 개인은 죽을 수 밖에 없으며 유한하다. 하지만 믿음을 통해 개인은 영생을 얻고 신적인 것의 무한성에 참여할 수 있다. 죽은 자의 부활이 그 자체로 지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와 유비적인 것은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신용을 통한 이윤의 생산, 자본을 통한 가치의 생산, 돈의 순환을 통한 돈의 생산이다. 이 순환은 단순히 인간의 "선한행위 Werken"와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이 순환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루터에 의해 은총을 향한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되었던 바로 그 믿음이."(베버, 위의 책 16쪽)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구원을 가능케 한다면 투자한 돈의 증식에 대한 믿음은 자본주의적 은총을 가능케 했다. 이러한 믿음은 미래의 자기 증식, 그를 통한 구원을 가능케 해줄 생산적이고 희망적인 시간에 대한 믿음을 전제한다. 그런 낙관적 믿음은 투자자들로 하여금 금고에 돈을 가두어 놓기 보다는 순환시키게 하며, 소비자들이 지금 당장 돈이 없더라도 미래의 신용을 담보로 소비할 수 있게 한다. 신에 대한 믿음이 하늘에서의 구원을 보장해준다면, 이러한 돈의 순환을 보장하는 국가에 대한 믿음은 세속적 구원 Redemption을 보장해 준다. (미국 달러 지폐에 써 있는 "In God we trust"라는 문구는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쯤되면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시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안이 어떻게 근대 자본주의와 더불어 새로운 진보와 발전의 역사관으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 짐작 할만하다. 자본주의와 더불어 시간은 파괴가 아니라 재생산, 증식, 나아가 구원의 매개가 된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우리는 이러한 낙관적인 자본주의적 순환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몇 배로 불어나 되돌아오는 돈을 꿈꾸던 투자자들은 자신이 애써 마련한 어미돼지까지 몰살당하는 상황을 맞이하였고, 미래의 구원만 믿고 집과 자동차를 신용 구매했던 미국인들은 그 모두를 잃고 빚까지 덮어쓰게 되었다. 그런데, 이 거대한 금융 - 돈 - 의 위기가 처음부터 어미돼지 따위와는 별 상관없이 살았던 사람들에게까지 어떤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하다. 잘나가던 자본주의와 더불어 우리가 한동안 잊거나 억압하고 있었던 시간에 대한 불안이 서서히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위대한 나라들"과 "도저히 멸망하거나 몰락할 수 없으리라 여겨지던 모든 제국들"을 다 몰락하게 했던 시간이, 서서히 하지만 중단 없이 지금의 우리들도 집어삼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수많은 희생자를 낸 지진, 화산폭발, 수해 등의 자연재해를 통해 증폭되고, 점점 더 완벽하고 철저한 파국을 묘사하기 위해 경쟁하는 많은 재난 영화들을 통해 리얼해진, 파괴자 시간에 대한 불안이 패닉에 가까운 형태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건 Vanitas 시대의 힘없는 멜랑콜리보다 더 공격적인 모습으로 분출하지는 않을까?

출처 : 비평고원(Critical Platea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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